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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경교장 기증한 ‘금광 거부’ 최창학

일제시대에 금광판은 노다지를 캐려는 한국인의 구미를 건드린 최고의 사업이었다. 양복쟁이나 상투쟁이,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저마다 백만장자의 꿈을 안고 금광 캐는 일에 뛰어 들었다. 서울 종로에 측량지도를 파는 서점에는 매일 지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조선총독부 광무과(鑛務課)에는 새로이 금광을 개발하겠다고 문서를 접수하러 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물론 금광 개발로 성공하기보다 망한 사람이 더 많다.

조선에서 금광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최창학이다. 그는 소년시절에는 행상무리에 섞여 각지를 전전했으나, 광산사업에 뜻을 두어 1923년에는 평북의 삼성(三成)광산을 경영했다. 그는 이 광산을 삼능(三菱) 재벌에 300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도 이전에는 십여 년 동안 지도 한 장 옆에 끼고 이 금광 저 금광으로 돌아다니던 일개 덕대(德大)에 불과하였지만, 금광 개발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다. 당시에는 100만원만 있으면 백만장자라고 불렀다.

그의 당시 재산이 얼마인지는 추측이 구구하지만 좋은 금광 백여 곳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의주 은행지점에 69만원의 예금을, 조선은행 서울본점에도 거액의 저금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대략 600만원 정도였다. 호남 지주 김성수가 500만원의 재산가였던 것과 금방 비교되는 부자였다.

최창학은 금광으로 성공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금광왕으로 불렸다. 그는 자선사업 등에도 막대한 사재를 냈는데, 삼성광산 매각 때에는 이 지방민에게 약 30만원의 채권을 포기했다. 평북 조악(造岳)공립보통학교 부지 및 건물을 기부했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5만 엔, 보성전문학교의 증축비로 1만 엔, 경성공업학교에 광산과 신축비 3만 엔 등을 기부했다.

해방 후에는 친일파로 몰려 고생했지만, 개인 별장으로 지은 죽첨장을 친일행위를 속죄하는 뜻에서 김구 선생에게 기증했다. 김구 선생은 이를 경교장이라고 개명하여 살다가 피살되었다. 그는 각 방면의 사회 공익사업에 많은 돈을 기부했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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