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뎬무’가 상륙한 날, 스티비 원더가 그 태풍의 핵이 돼 대한민국의 감성을 강타했다. ‘현대카드 슈퍼콘서트XI 스티비 원더 내한공연’이 열린 10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이 발원지이자 진앙지였다.
예상 시각보다 30분 늦은 이날 오후 8시30분. 최대 수용 인원인 1만여 좌석은 물론 새로 꾸려진 오디오석까지 관객이 빼곡히 들어찬 장내에 함성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이어 검은 안경과 레게 헤어스타일의 스티비 원더가 키보드를 어깨에 둘러멘 채 등장했고, 첫 곡 ‘마이 아이즈 돈트 크라이’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지는 히트곡의 향연은 이날 공연장을 찾은 10대부터 5, 60대 관객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연 앞부분에선 ‘유아 더 선샤인 오브 마이 라이프’ ‘예스터 미, 예스터 유, 예스터데이’ ‘파트타임 러버’ ‘수퍼스티션’ ‘아이 저스트 콜드 투 세이 아이 러브 유’ 등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넘버들을 골랐고, 후반부로 갈수록 ‘아이 위시’ ‘포 원스 인 마이 라이프’ ‘고 홈’ 등을 관객과 함께 연창했다. 천진한 세 아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이즌 쉬 러블리’를 사이좋게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모습은 감동을 선사했다.
평화의 메신저를 자처하기도 했다. ‘하이어 그라운드’의 전주가 은은히 흐르는 가운데 “불을 모두 끄고 눈을 감은 채 상상의 세계로 떠나보자”고 제안한 뒤 “남한과 북한은 전쟁이 아닌 대화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힘을 줬을 땐 객석이 떠나갈 듯 갈채가 터져나왔다.
지난달 12일 티켓 예매 개시 30분 만에 전 석 매진의 신화를 기록한 건 그가 팝스타이자 히트 메이커여서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의 영달을 위한 스타에서 머물지 않고 음악이 인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소비되는 방식을 몸소 보여줘온 데 따른 결과다. 그는 맹인이면서 누구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과 평화라는 주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어필해온 대표주자다.
이날 30여 곡을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그의 얼굴에선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보드와 피아노를 다루는 빼어난 기량도 여전했다. 마지막 곡은 ‘어나더 스타’였다. 길고 긴 여운을 남긴 채 스티비 원더가 무대를 내려간 뒤에도 관객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갈라지거나 솟아오르는 현란한 무대장치도 없었고, 화려한 코러스나 오케스트라를 배치하지도 않았다. 무대에는 스티비 원더만 있었다. 1만 관객은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고 차마 눈을 감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그와의 만남을 가슴에 새겨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