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몽 드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코쟁이 검객 시인 시라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하는 연적을 위해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심지어 그로 변장해 사랑 고백까지 해준다.
로스탕의 희곡에서 이는 헌신적인 자기 희생이지만, 그를 벤치마킹한 김현석 감독의 신작 코미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의 주인공들에게 이것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다. 전직 연극쟁이들인 그들은 전공을 살려 연애 초보자들에게 대사를 써주고 연기 지도를 해주고 사랑 고백을 위한 세트와 엑스트라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순전히 사업만으로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는 법. 영화가 두 번째 고객인 펀드매니저 상용을 소개하는 순간, 기름 잘 친 기계처럼 굴러가던 시라노 일당은 위기를 맞는다. 상용이 교회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타겟녀 희중은 리더인 병훈의 옛 여자친구였기 때문.
로스탕의 희곡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그만큼 김 감독이 지금까지 꾸준히 만들어왔던 로맨틱 코미디의 흐름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연애에 쑥맥이고 한없이 찌질한 남자가 꿈결처럼 아련한 여자 주인공 앞에서 자신의 한심함을 고백하고 열심히 반성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영화에서 그 반성은 직업의 핑계를 대고 더욱 노골적이 된다. 단순한 내면적 자기 반성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시라노 일당의 전문가적 손길이 닿자, 로맨틱 코미디라는 형식 자체도 다른 식으로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 장르는 이제 영화 자체에 의해 분석되고 해부된다. 류현경과 송새벽이 나오는 첫 번째 임무는 모든 진부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해부하는 과정에 가깝다.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 박신혜와 같은 배우들의 콤비 플레이는 훌륭한 편. 다소 도식적인 구석이 있는 설정이지만, 이들이 이에 갇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이들을 적재적소에 넣고 활용하는 연출자의 테크닉도 훌륭하다. 16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