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조산(祖山)이었으므로 일찍부터 영산(靈山)으로 신성하게 여겼는데, 17세기에 청나라가 만주에서 건국하면서 그들 역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며 건국의 발상지로 여겼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 종종 국경분쟁이 발생하였고,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조선과 청나라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청나라는 서양 선교사 레지 신부 등을 백두산 부근에 파견하여 측량하고자 하였으나 교통이 막혀 실천하지 못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파견하여 국경회담을 제의하였다. 숙종은 박권을 대표로 임명하면서 “강역(疆域)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라”라고 단단히 당부하였다. 청의 대표인 목극등은 오만하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우리 측 대표를 압박하였다. 목극등은 백두산 정상 부근인 혜산에 도달했을 때 우리 측 대표인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은 노대신이고 항상 말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백두산 꼭대기에는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으니 혜산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조선 측 대표는 “우리도 왕명을 받고 온 몸이므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백두산에 올라가겠다”고 하였으나 목극등은 단호히 거절하고 우리나라의 통역관과 군관만을 데리고 백두산에 올랐다. 일행이 백두산 마루에 올랐을 때 목극등은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이다”고 말하며 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서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 서쪽 압록강은 조·청 간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지만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는 규정에 대하여 해석이 엇갈리게 된다. 조선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을 경계로 알았으며 청나라는 토문강은 두만강이라고 우기게 된다. 이는 19세기 간도 영유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백두산 천지는 정계비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통역관인 김지남의 훌륭한 역할로 조선 땅으로 확보하였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