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렸다. 수도권이 물난리를 겪는 와중에 추석 기간 TV는 오로지 예능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데 급급했다. 물론 오래전부터 예정된 편성이라 급하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간 중간 속보가 나오긴 했으나 방송 3사는 오후 내내 자사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을 몰아서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요컨대 하이라이트 편성이었다. 덕분에 비 피해 관련 소식은 방송이 아니라 인터넷과 모바일, 특히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그건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순간이었고 바로 지금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를 줬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는 얘기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는 ‘귀여움의 시대’라는 챕터가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그래서 그것이 사라진 시대가 도래한 지금 한국 사회의 무게중심이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챕터에서 그는 가벼움의 시대, 내면의 수치심 대신 타인들의 평가에 대한 강한 관심-자의식이 지배하는 시대, 엔터테인먼트가 역사성을 대체하는 시대, 그런 시대 안에서 성장을 거부하는 키덜트의 시대를 분석한다.
‘성장과 성숙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유아에 머무르는 이 최후의 인간들은 세계를 일종의 만화로 변모시키며, 만화처럼 단순화되고 캐릭터화된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유지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가난한 안락’외에는 삶에서 아무런 야망도 소망도 없는 이 포스트 히스토리의 지배적인 삶의 유형, 최후의 인간들이 영위하는 삶의 유형, 그것이 바로 귀여운 삶이다’.
단언하건대, 지금 우리는 엔터테인먼트가 지배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TV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일상의 거의 모든 자리가 ‘예능 프로그램’처럼 전환되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는 이 세계의 문제들을 일종의 게임으로 전환해 사고하게 만든다.
세계와 대립하면서 부닥치는 게 아니라 세계와 거리를 두고 관망하게 만들며 우리를 구경꾼이자 시청자로 만든다. 연예인의 성공스토리도, 정치인의 정책 발표도, 스포츠 팀의 우승 소식도 모두 순간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게 우리 삶과 보다 내밀하게 관계 맺는 순간은 오직 그것이 자기 계발의 사례로 치환될 때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올해 추석 특집 프로그램 중에서 흥미로웠던 순간을 요약했겠지만, 폭우가 바꿔놓았다. 그 실제의 사건 혹은 위기가 현재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할까.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