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21일 아침, 부인 미셸의 볼에 깊은 입맞춤을 한 뒤 단상에 오른 버락 오바마는 대법원장의 선창에 따라 취임선서를 마침으로써 제44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첫 행위로 ‘국가 재건과 화해 선언문’에 서명했다. 클로즈업된 화면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된 신임 대통령의 손에는 ‘Cross’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펜이 들려 있었다. 크로스가 ‘대통령의 펜’으로 이름을 알린 순간이다.
그가 이날 선언문 서명에 사용한 펜은 ‘타운젠트 라카블랙 575’라는 제품.
신임 대통령이 첫 서명에 사용했을 정도면 크로스는 미국의 상징이라 불러도 좋을 위치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초강대국 국가원수가 쓰는 펜 치고는 유명세를 덜 탄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된 ‘미국의 펜’은 누가 뭐래도 ‘파커’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협정에 아이젠하워가 서명할 때, 1990년 미국과 구소련이 냉전종식을 선언하던 문서에 서명할 때의 주인공도 여지없이 파커였다.
100년 넘게 미국 역사를 써온 ‘대통령의 펜’이 언제, 왜 크로스로 바뀌었는지 공식적으로 설명된 적은 없다. 다만 1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난 2000년 파커는 영국계 생활용품 회사인 뉴웰 러버메이드(Newell Rubbermaid)에 인수됐다. 한국에서도 완구용품 ‘리틀타익스’로 잘 알려진 이 회사는 워터맨, 로트링, 페이퍼메이트 등의 필기구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다.
파커가 ‘Made in U.K’로 바뀐 지 얼마 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서류에 서명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대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손에는 파커 대신 크로스가 들려 있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하나. 부시 전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 불렀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크로스 펜 애용자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그는 ‘미제’ 크로스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