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잠시 쉬고 있을 때다. 묵혀 두었던 ‘태백산맥’을 읽으며 흘렸던 눈물과 감동, 전율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인생 최고의 독서 체험이자 무지몽매했던 역사의식 자체를 새롭게 정립시킨 혁명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동경하고 추앙하던 대작가 조정래 선생을 작년 계간 ‘문학의문학’ 대담 준비를 하며 처음 뵙게 되었다.
그때 선생은 “이 세상의 모든 문학 작품은 모국어의 자식이다. 따라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시대, 그 사회의 모순과 비극을 써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모국어의 나라에 빚 갚음하는 작가로서의 책무다. …… 자본주의의 천박성에 전 세계가 휘말리고 있다.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작태를 스케일 크게 집필할 계획이다. 각 분야 지배 계층들의 조직적 결탁과 그들의 위선, 그리고 그 횡포와 돈을 좇는 각축에 대해 구상 중이다”고 하셨다.
선생은 ‘한강’ 이후 10년간 품어온 ‘경제민주화’라는 큰 주제를 위해, 1년 넘게 발로 뛰는 치밀한 현장 취재와 목숨을 걸고 썼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층과 재벌들의 비리를 신랄하게 파헤친 ‘허수아비춤’을 탈고했다.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은 70세 가까운 나이에,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3개월간 집필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정신투쟁을 벌이며 이루어낸 우리 문학사의 또 하나의 쾌거이자, 금기와 성역의 높은 담장을 허무는 위대한 펜의 힘을 보여준 인간 승리의 증거다.
‘허수아비춤’을 통해 작가는 미완의 정치민주화 시대를 넘어 자본과 분배의 원칙이 올바르게 지켜지는 경제민주화 시대로의 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를 위해 시민 세력들이 단결해 옳지 못한 기업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을 벌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조직은 투명하고 깨끗하게 정화시켜야 하는데, 그 중추 세력은 양심과 도덕성이 뒷받침된 시민사회단체임을 강조한다. 또 처자식과 먹고사는 일에 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젊은 날의 열정과 정의를 잊어버린 너와 나, 부패한 권력에 자발적 복종을 해버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담겨 있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며, 정의가 물결치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한국 최초 ‘경제민주화’ 소설이다.
특히나 ‘재미있지 않으면 쓰지 않겠다’는 작가의 평소 지론대로 능수능란한 입담과 파노라마적 풍자로 돈에 미쳐 날뛰는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통쾌하게 고발하는 현란한 필치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또 선 굵고 스케일 큰 심리 묘사와 수컷들의 처세술,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는 물론,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정교하고 리얼하게 파헤치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임문희
(문학의문학 편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