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65년, 데이트 장소는 ‘국제중앙다방’이다. 남자는 이 다방 이름이 괜찮지 않느냐며, 커피를 주문하면서 설탕과 프림은 따로 가져달라고 한다. 자신이 미군 부대 카투사 출신이라 커피 맛은 좀 안다며 설탕과 프림을 직접 타 넣어 여자에게 건넨다. 이어 남자는 여자에게 보자기에 싸온 선물을 주면서 펴보라고 한다. 여자가 말한다. “어머, 라면 위에 티파니가 있네요.” 티파니라고 쓰인 반지함을 열어보곤 여자는 물론 감격하고, 남자는 약간 더듬거리며 프러포즈를 한다.
독립영화 ‘계몽영화’의 한 장면이다. 계몽영화란 영화의 한 장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영화 제목 자체가 ‘계몽영화’다. 대체 뭘 계몽하려는 걸까, 하고 호기심이 들었는데 3대에 걸친 한 가족에 얽힌 우리 역사 되읽기였다.
65년이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20년이고 6·25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 지났다. 하지만 거리의 풍경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알고 보니 일제시대의 연장이고 데이트하러 나온 남녀는 10년도 더 지난 전쟁 때의 참혹한 기억을 화제로 삼는다. 꽤 시간이 지났다고 여겼지만 지난 세월의 흔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방 이름은 ‘국제’를 지향하고 ‘중앙’에 서고자 한다. 그게 당대 사람들의 꿈이기도 했다. 조선 촌놈이 아니라 국제적이고, 변두리가 아닌 중앙의 주류가 되려는 삶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남자는 남들이 선망하는 미군부대 카투사 출신 아닌가?
그런데 데이트 장소에 라면이 웬 말인가? 요즈음이야 라면은 하찮은 서민의 요기 때우기에 불과하지만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건 일본에서 나와 유행한 신상품인 데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그 기술을 가져다가 소고기 원료 수프를 써서 팔았으니 인기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자기에 싸서 가져다 준 남자의 모습도 재밌거니와, 그 위에 티파니 반지는 요즘으로 치면 명품 백을 얹어 놓은 셈이다. ‘국제적’인 ‘중앙’ 다방에서 신상품 ‘라면’에 명품 ‘티파니’ 반지를 올려놓았으니 이 이상 첨단의 선물은 없는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장면을 되돌려보면, 그런 코미디가 또 없게 된다. 그 앞에서 우린 ‘계몽’된다. 우리가 지금 사는 모습이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코미디기 되지는 말자고.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