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목극 ‘장난스런 키스’가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물론 잘 모를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 자리 시청률을 유지하며 원작과 배우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에서 화제(분노에 가까운)를 만들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드라마는 같은 이유로 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19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TV 드라마를 접하고 90년대에 이르러 드라마를 통해 세대적 감수성을 발전시킨 사람들에겐 말이다. 그 세대에겐 황인뢰 감독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만만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런 키스’는 요컨대 황인뢰 감독의 어떤 기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TV라는 구조 안에서 세련되고 독특한 미학이 가능하리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모두가 드라마는 영화보다 한 급수 아래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그는 미장센과 오브제라는 영화용어를 TV로 끌어왔고 과감한 생략과 연출로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장난스런 키스’의 수준 이하의 내러티브와 구태의연한 연출은 보기에 괴롭다. 이 모든 구조는 오하니(정소민)의 집처럼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채로, 마침내 클라이맥스로 가까스로 향해간다.
가장 큰 문제는 인물들이 한 뼘도 자라지 않는단 사실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환경이 바뀌고 오하니와 백승조(김현중)가 10대에서 20대로 진입해도 그들은 여전히 17살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오하니와 백승조의 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인물들은 성장을 포기한 듯 하나같이 그때 그 시절에 머무르는데, 특히 어른들이야말로 이 장난스런 판타지와 엄연한 현실을 연결할 유일한 고리임에도 그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고, 아니 삭제당하고 만다.
‘궁’의 판타지가 신선했던 것은 성인 연기자들과 어른 캐릭터들이 나름의 무게중심을 잡으며 극에 현실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것은 판타지 드라마에서 하나의 전형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애초에 그걸 제시했던 황인뢰 감독은 ‘장난스런 키스’에서 스스로 그 균형을 포기한다.
‘장난스런 키스’는 아무도 자라지 않는 세계의 로맨스다. 상처 하나 없이 어른이 되는 세계가 건강할 리 없다. 그들은 아픈 게 아니라 그저 아픈 척할 뿐이다. 따라서 이 로맨스는 연애를 가상현실로 배운 누군가의 비밀일기에서나 묘사될 판타지다.
덕분에 아무리 만화 같은 틴 드라마도 기본은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기본,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