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왕이나 어른들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도 못했고 그 글자는 쓰지도 못했는데 이를 피휘(避諱)라고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왕자의 이름은 대부분 글자를 만들어 썼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출생했을 때 이름은 ‘도( )’다. 이는 복(福)자와 도(陶)자를 합성하여 만든 글자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 임금이었던 정조(正祖)의 처음 이름은 이산(李 示示)이었다. ‘示示’자도 웬만한 사전이나 컴퓨터에는 나오지 않는 특이한 글자이다.
정조는 1776년에 즉위하였는데 이 해에 충청도에 있는 이산현(尼山縣)과 평안도에 있는 이산현(理山縣)은 정조의 이름과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이산으로 똑같기 때문에 충청도의 이산현은 이성현(尼城縣)으로 평안도의 이산현은 초산현(楚山縣)으로 군현의 명칭이 바뀐다.
그런데 1800년에 충청도의 이성현(尼城縣)은 또다시 군현 명칭이 노성현(魯城縣)으로, 함경도의 이성현(利城縣)은 이원현(利原縣)으로 바뀐다. 왜 그랬을까? 이것도 정조 이름을 피휘한 결과이다.
정조는 자식이 귀했다. 왕비 청풍 김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의빈 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일찍이 어린 나이로 죽었다. 늦게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를 낳았지만 왕자가 한 명뿐이었다. 노론 세력들과 치열하게 겨루면서 장용영이라는 제도에도 없는 특별 경호팀을 운영하였던 정조는 외로웠으므로 왕실을 튼튼히 하고 자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정조는 자기 이름을 이성(李 )으
로 바꾸었다. 이는 조선 중기 서성(徐 )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인데 그는 대구 서씨의 중흥조이며 자손이 아주 많았던 인물이다.
정조는 이름을 바꾸고 군현의 명칭을 두 번씩이나 바꾸면서 후손이 많기를 바랐지만 정조의 아들 순조를 지나 손자 헌종대에서 정조의 대는 끊어진다. 이름까지 바꿔 가며 후손이 많기를 바란 정조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