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주일처럼 밀도 있게 ‘노인’을 의식하거나 접한 적이 없던 것 같다. 친정아버지의 칠순잔치를 힘들게 치러내고, 강부자의 연극 ‘친정엄마’ 연기를 울며 관람하고, 뒤늦게 지하철 난투극 동영상을 보고, 일면식 없는 노인들을 우울하게 상상하며 밀린 의료보험료를 냈다.
사실 평소 노부모와 함께 살거나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노인과 접하고 대화하는 일은 암묵적으로 다들 피하는 일이다. 칠순잔치를 치르며 나는 결국 아버지와 열 마디도 채 못, 아니 ‘안’ 나눴다. 늙음은 아무리 미화된들 환영받긴 참 어렵다. 품위 있게 나이 먹는 이는 소수이며,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지는 이들은 그보다 더 극소수다. 대신 우리가 목격하는 노인들은 주로 병들고 가난하거나, 돌봄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외로움과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재력으로 자식들의 관심을 통제하려는 모습들이다.
그래도 경제적 여건에 따른 수직적 분류를 넘어 수평적 분류, 즉 ‘캐릭터’의 차이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 하더라도 가까운 예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남성노인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노인 A는 내 어린 딸을 볼 때마다 파안대소를 하며 쓰다듬으려 한다. 노인B는 내 딸을 보는 둥 마는 둥 흔한 립서비스 한마디 없다. 그러나 노인A는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빈 소주병들을 옆구리에 끼고 나온다. 얼굴도 벌겋고 술 냄새도 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노인B는 손에 삽과 물통을 들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삭막한 아파트의 빈 녹지를 꽃밭으로 탈바꿈시키는 중이다.
나는 내 자식 예쁘다 해주는 노인보다 내 자식이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예쁜 꽃을 심어주는 노인이 좋고 고맙다. 예쁘다 칭찬해주면서 아이의 공손한 인사를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반갑지 않다.
노인을 공경하거나 모셔야 한다는 강박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대신 노인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노인이 있다는 게 얼마나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별로 친하고 싶지 않은 노인과 억지로 친한 척 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