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우리 동네 과일가게는 요즘 자정 넘어서까지 불을 밝힌다. 바로 옆에 커다란 수퍼마켓이 들어서서다. 70m 남짓 늘어선 상가는 밤늦도록 환하다. 동네 터줏대감이던 빵집은 프랜차이즈 제과점 때문에, 10년 된 분식집은 떡볶이 체인 눈치를 보느라 먼저 문을 닫지 못한다.
하루 종일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돈이 결국 기업으로 흘러든다. 피자와 학용품까지 대형마트에서 물량 공세를 펴면서 동네 피자가게와 문구점은 울상이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폐업 위기에 몰려 허덕이는 것도 이런 이유다. ‘열심히만 일하면 성공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순진한 질문이다.
이제 동네 수퍼의 경쟁 상대는 옆 동네 수퍼가 아니라 기업형 수퍼마켓(SSM)이다. 동네 빵집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쥐고 있는 대기업 빵집과 싸워야 한다. 체급이 다르다 보니 아예 경쟁이 안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 달에 10만 명이 넘는 자영업자가 사라지고 있다. 이들이 밤늦도록 장사하는 것도 원래 성실해서가 아니라 결국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게 차가운 현실이다.
거침없는 식탐으로 골목 상권을 먹어 치우고 있는 대기업들의 SSM은 요즘 뜨거운 감자다. 중소상인들의 반감이 커지면서 SSM 개점을 반대해 불까지 지르는 방화시위가 등장할 정도로 인심이 험악해졌다. 상생정책을 운운했던 정부가 막상 SSM 규제에 머뭇거리는 사이, 그 숫자는 무섭게 늘었다. 4년 전 292개였던 SSM은 1년에 100∼200개씩 불어 현재 700여 개에 달한다.
오늘(25일) SSM을 규제할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국회에서 계류된 지 6년 만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는 가맹점 형식의 변형 SSM을 억제할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은 여야가 정기국회 회기(12월 9일) 내에 따로 처리하기로 해, 중소상인들은 또 미뤄지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정부가 최근 국정운영 철학으로 내세운 ‘공정사회’는 크기에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사회다. 꿈으로 일군 작은 가게가 꽃을 피우고 씨를 뿌려 동네 상권이 살아나야 지역 경제가, 나라 경제가 기운을 얻는다. 상생법도 서둘러 처리돼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