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마녀는 원래 타고 태어나기를 사악하게 태어났다? 아니다, 다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느 쪽일까? 선과 악이 애초부터 확실하게 구별된 세상에서 일단 악이라고 규정된 존재는 이해받기 어렵다. 사실, 이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단지 비난과 질타 그리고 규탄과 정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른바 ‘마녀 사냥’이란 이렇게 시작되고 마무리 지어진다.
소녀 도로시와 강아지 토토 그리고 허수아비와 양철 깡통 아저씨, 사자 이렇게 다섯은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주역들이다. 오즈의 마법사와 마녀들 역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동화적 존재들이다. 여기서 동쪽과 서쪽 마녀는 모두 사악하며, 남쪽과 북쪽 마녀는 선하다. ‘오즈의 마법사’를 쓴 작가 프랭크 봄이 그런 설정을 한 까닭은 19세기 말 미국 캔자스주 농민들의 삶을 투기로 피폐하게 만든 동부와 서부의 자본가들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의 생명을 독자적으로 지니고 있어서 대중들의 손에 들어가면 작가의 의도와는 별도로 그 재미나 가치가 만들어지곤 한다. 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당시 대공황의 충격과 상처에 힘겨워 하던 미국 대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로 부각된다. 프랭크 봄이 원작에서 파헤쳤던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은유적인 묘사보다는 허수아비, 양철 깡통 아저씨, 사자로 상징된 지혜와 사랑 그리고 용기의 의미가 더 깊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최상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뮤지컬 ‘위키드’는 사악한 마녀와 착한 마녀라는 식의 흑백논리를 벗어나 사악한 마녀로 지목된 존재의 아픔과 과거를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다. 뮤지컬을 보는 내내 사람들은 본래의 ‘오즈의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깊이 파묻혀 들어간다. 고정된 시선이 변화하고 선과 악의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인간 이해의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뮤지컬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된 셈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걸 가지고 원작 훼손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뛰어난 연출과 가창력 풍부한 연기력 그리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무대가 탄탄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는 도리어 문학적 상상력과 창작의 예술성에 대해 경탄하게 만든다.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고 공연되는 현장은 삶에 활력과 재미를 더해준다.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인간 이해와 그로써 이루어지는 기쁨을 이뤄내는 방식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