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농민혁명의 영웅 사파티스타와 백마,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그린 화폭은 보는 이를 한순간에 압도하는 힘을 뿜어냈다.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이다. 그 앞에서 숨이 멎는 듯 했다. 망명 중이었던 트로츠키와도 염문을 뿌렸던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기도 하고 모딜리아니의 친구이자 피카소와 한때 교우했던 그는 마야, 아티카 고대문명의 혼을 이어받아 멕시코 벽화의 새로운 전통을 세운 거장이었다.
샤갈의 그림 역시 관람자의 정신세계를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몽환적 차원으로 날아가게 한다. 시계가 녹아버리는 듯한 기묘한 풍경을 그려낸 달리, 사자가 달이 뜬 사막 위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은 루소 등은 모두 익숙하게 보아온 것들이지만 원화가 주는 감동을 기대 이상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마티스의 ‘춤추는 사람들’은 파란색의 원시적 생명력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아쉬움 없이 드러낸다.
흔히 ‘모마(MoMA)’라고 줄여 부르는 뉴욕의 ‘현대미술박물관(Museum of Modern Art)’에는 세기적 거장들의 작품 다수가 관람자들의 영혼을 마술처럼 사로잡고 있었다. 사진으로 접해보기도 했지만 거장들의 컬렉션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드물게 경험하는 축복이다. 이름만 들어도 경이로운 이들의 유작을 직접 만나보니 그들의 가슴에 펼쳐진 예술적 영성의 비밀을 발견하는 흥분을 가져다준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갈 기회가 있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올레길이 아니라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그곳은 이중섭이 한때 그의 가족들과 거주했던 초가집과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어느 한 작가의 이름으로 그만한 공간이 일구어졌다는 것은 우선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서면서 아쉬움이 깊어만 갔다. 이중섭의 작품과 그의 삶이 스민 기운을 느끼기에는 소장한 예술재산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 그가 가족들과 살았던 조그만 방과 그의 사진은 빈곤에 허덕이며 아팠던 한 천재작가의 외로운 마음과 호흡하게 해주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이런 느낌은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효석과 그의 문학세계보다는 여러 종류의 메밀상품이 주인이 되고 있다는 인상에 뭔가 주객이 바뀐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버려지다시피 있는 부여읍 ‘신동엽 생가’는 아예 충격이었다. 예술가의 삶과 그의 예술이 주는 감동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무지한 시대와 사회는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여전히 가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