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처럼 싸우던 남녀가 슬며시 미운 정이 든다는 설정은 로맨틱 코미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단골 레퍼토리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1930∼194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코미디의 하위 장르로, 당시 대공황에 지친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의 여주인공이 속사포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대사와 이에 쩔쩔매는 극중 상류층 남성들의 모습에서 웃음을 찾았다.
4일 개봉될 임창정·엄지원 주연의 ‘불량남녀’는 한국적인 스크루볼 코미디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동료의 빚 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형사와 빚 독촉이 장기인 카드사 여직원의 티격태격 사랑 만들기를 앞세워 페이소스가 있는 웃음을 유발하려 애쓴다.
형사 방극현(임창정)은 중요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카드사 여직원 김무령(엄지원)은 빚을 갚아야 할 극현이 자꾸만 전화를 피하는 것같아 슬그머니 약이 오르고, 그러던 어느날 둘은 결국 전화로 대판 싸움을 벌인다. 극현을 찾아 경찰서로 쫓아간 무령은 자신의 핸드백을 찾아준 마음씨 착한 형사가 극현이란 것을, 극현 역시 잠깐 호감을 품었던 핸드백의 주인이 무령이란 것을 역시 알게 되면서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우여곡절 끝에 친해진 이들은 각자가 처한 다른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지만, 사랑이 맺어지기에 주위 여건은 힘들기만 하다.
웃음의 대부분은 임창정과 엄지원의 개인기로부터 비롯된다. 임창정은 연민과 동정을 자아내는 특유의 불쌍한 표정과 능청스러운 대사 연기로, 엄지원은 하이톤의 갈라지는 목소리로 각각 보는 이들의 배꼽을 빼놓는다.
아쉬운 점은 웃음의 장치가 그게 전부란 것이다. 일부 계층을 제외한 국민 대다수가 채무로 허덕이는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기지와 해학이 조금 부족하다. 그냥 한번 웃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울 법한 소재와 주제를 허투루 소비한 흔적이 짙다. 물론 웃기므로 기본 점수는 받을 수 있겠다.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