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이나 마트 등의 공공장소에서 가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잡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울컥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자기 아이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올 법한 통제 불가능한 아이라며 “난들 좋아서 이러는 줄 아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의 육아전문가는 아이가 폭력적인 것도, 떼쓰는 것도 다 애초에 부모의 잘못이라 한다. 동감하며 더불어 반성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일부터 시행된 초·중·고교 체벌금지규정이 조심스럽고 걱정도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반갑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데”라고 하지만 그 얘기는 옛날옛적부터 있던 얘기다. ‘학생을 생각해서’ 매를 든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소통방식의 한계를 인정할 뿐이다. 이에 응수하는 아이들의 소통법은 “그저 입 막고 잠시 몸 대주자”일 것이다.
이런 패턴 적지 않게 있다. 직장상사가 버럭 야단치면 그저 고개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기계적으로 뇌까리는 직원들. 이 계보의 ‘오야붕’은 단연 ‘까라면 까’의 조폭형님들. 하긴 이건 한때 최고 권력자들의 모습과도 바로 오버랩이 된다.
익숙하다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나 때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맞고 컸어” “애들은 좀 맞아가며 커야 돼”. 체벌로 교육의 효과를 봤다고 확신하는 일부 교사에겐 안타까운 법안일 수 있지만 매라는 대안이 없어질 때 생기는 새로운 창의적인 소통방식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져줄 순 없을까.
결국엔 아이들에겐 부모가 먼저 잘해야 하고, 학생들에겐 선생이 먼저 잘해야 하고, 직원들에겐 상사가 먼저 잘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잘 하느냐에 따라 대상들이 나를 존경하기도, 만만하게 보기도 하지만. 더불어 정부는 부모와 선생과 상사들이 ‘제대로’ 잘할 수 있도록 시스템 좀 잘 만들어 백업해 주심이.
분명한 것은 교복을 입다가 안 입다가 변덕부릴 순 있어도, 한 번 체벌금지를 내렸다가 다시 체벌허용을 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행여 그날이 온다면 그날이 나 이민 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