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소비의 패러다임 전환
박경철(이하 박):공정무역을 주도하는 단체로 WFTO와 공정무역상표협회(FLO)가 있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클라리벨(이하 클):WFTO는 70여 개국 400개 공정무역 단체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다. FLO는 공정상품의 규격을 정해 인증을 부여하는 기관이다. 두 단체 모두 저개발 국가의 소외된 생산자의 생계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박:한국 사회에 윤리적 가치로 ‘정의’가 대두되고 있다. 앞으로 실천적 가치로서 ‘공정’이 부각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아래 세계 각국이 탐욕을 부리는 상황에서 공정무역이 어떤 의미일까.
클:가장 큰 성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전체에 걸쳐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소비자는 제품 뒤에 숨겨 있는 생산자의 삶과 환경보호까지 생각하게 됐고, 기업은 공정무역 기준을 따르면서도 환경까지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됐다.
박: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클:자유시장에선 볼 수 없던 직거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유무역은 중계상을 반드시 거쳐야 해 더 긴 공급체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공정무역에선 조력자(생산자)와 소비자의 간격이 줄어들고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가 오래 유지된다. 궁극적으로 조력자에게 수익이 제대로 돌아가게 한다.
◆‘페어워싱’ 막기 위한 약속 필요
박:자유무역에서의 ‘개별생산자’가 공정무역에선 ‘조력자’로 표현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근본적 취지엔 동의하지만 지구촌은 국경 없는 자본 이동을 통한 이윤 극대화가 기업의 목표다.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서 공정무역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닌가, 회의가 들기도 한다.
클:제일 크면서도 어려운 과제가 공정무역 시장 확대와 동시에 어떻게 진정성을 지켜나갈 것인가에 있다. 현재 공정무역은 전 세계 무역거래량의 0.01% 정도를 차지하는 수준이다. 이 비율을 늘려야 하지만 시장이 커지면서 공정무역의 기준이 지켜지기 어려울 수 있다.
박:대기업이 판매액의 극히 일부를 이미지 재고 용도로 공정무역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다. 나무를 많이 베고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이 ‘친환경’이란 라벨을 다는 것처럼 말이다. 공정무역 규모가 커질수록 ‘페어워싱’(공정세탁)도 문제가 될 것 같다.
클:우려되는 건 공정무역을 홍보나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무역 참가 브랜드는 완벽한 공시를 통해 자신의 공정무역 활동을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공정무역 제품이 자사 제품의 몇 %에 달하는지, 몇 년 내에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공정무역의 양을 얼마나 늘리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생산자 목소리 대변할 것”
박:공정무역이 실제 생산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대상이 되는 일부 공급자에게 주는 로또 같은 기회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클:공정무역이 유토피아처럼 완전한 과정이라 할 수 없다. 자유무역시장에 대한 완벽한 해결 도구도 아니다. 무역시장에서 힘의 불균형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공정무역에선 생산자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고 WFTO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박:일각에선 공정무역제품의 경우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걸 한계로 지적하기도 한다.
클:네팔에선 생산자의 마스크, 귀마개, 환풍기 사용 등 노동환경도 공정무역제품의 인증 기준이 된다. 일반 제품에선 배제되는 비용이다. 또 공정무역제품은 소량 생산되다 보니 유통비용이 더 든다. 그 비용의 차이를 소비자가 부담한다. 그러나 기꺼이 부담할 수준이고 공정무역이 성장하는 기부도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 ‘공정’이란 화두가 던져졌다. 사회적 부조리를 입막음하려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는 한계에도 민주화운동 이후 공감대가 사라진 시대적 지향으로서의 울림은 컸다. ‘정의’라는 좀 더 광범위한 가치와 함께 우리 사회의 근본적 반성을 요구했다. ‘공정’은 관계에 대한 문제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용자와 노동자’ ‘국가와 국민’은 물론 ‘인간과 지구환경’까지 아우른다. 때마침 지난주 ‘2010 국제공정무역회의’ 참가를 위해 클라리벨 데이비드 세계공정무역기구(WFTO) 이사회 부의장이 한국을 찾았다. 12년간 공정무역운동에 헌신해온 그를 ‘시골의사’라는 애칭으로 친숙한 경제평론가 박경철씨가 좌담 형식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