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연극적 책읽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박태원이 1934년 신문에 연재한 동명의 소설을 연출가 성기웅이 무대로 옮겨 들려준다.
‘들려준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이다. 즉 소설을 각색해 극화하지 않고 소설을 여러 인물이 나누어 쉼표나 마침표까지 읽는다. 물론 극본이 책의 전부를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작가에 의해 선택된 부분만이 극화되고 또한 새롭게 창작된 부분이 뒤섞인다.
박태원의 원작은 소설가 구보가 아침에 나와 할 일 없이 찻집과 술집, 경성 시내를 돌아다니며 듣고, 보고, 생각하는 소소한 일과를 담았다.
전차 안에서 맞선을 봤던 처자를 만나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고민하기도 하고, 친구와 저녁을 먹는 중에도 소설 구상을 즐기는가 하면, 술집 여급들과 싱거운 농담과 객기를 부리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하루를 명랑하면서도 우울하게 그린 모던한 작품이다.
성기웅은 1930년대 경성에 사는 모더니스트 구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무대에 재현한다. 책의 독자마다 갖는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글을 쓰는 박태원과 소설 속의 주인공 구보를 별개의 캐릭터로 등장시키고, 당시 경성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과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을 영상을 통해 주석처럼 곁들여 다큐멘터리 적으로 풀어냈다.
구보가 떠도는 명동과 종로, 동대문 거리는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라 그의 방랑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성기웅은 1930년대에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그 시기가 근대적인 도시가 형성된 시기이고 현대의 문제들이 잉태된 시점이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전작들에서 엄숙하고 진지하게 나라 빼앗긴 울분을 담아낸 30년대를 다룬 대다수의 작품과 다르게 명랑하고 경쾌하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경성의 풍경을 그려냈다. 이번 작품 역시 그 연장선에 위치하지만 연극적 책읽기를 시도한 다원적인 방식만은 다르다.
또 이전 작품이 당시 조선인 지식인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은연중에 드러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은근히 배어 있던 역사성이 더욱 숨겨지고 현실과 이상에서 고민하는 작가적인 외로움이 더욱 부각된다.
하루 종일 떠돌고도 집에 들어가지 못해 한참을 가로등 아래 쭈그려 앉아 있는 구보의 모습은 마음을 둘 곳 없는 현대인의 초상 같다. 31일까지 두산 아트센터 스페이스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