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별세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장례가 8일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고인의 유해는 광주 5·18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수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후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던 중 간경화 증상이 겹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진보-보수 진영으로부터 극단적 평가를 받았다. 진보진영은 ‘사상의 은사’로, 보수진영은 ‘의식화의 원흉’으로. 그가 이 같은 평가를 받은 데는 그가 1970년대 중반에 펴낸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몇 권의 사회평론집이 대학가와 운동권에서 널리 읽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원래 언론인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을 마친 후 영어교사를 하다가 6·25가 터지자 입대한 그는 7년 복무를 마치고 57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자 초년병 시절이던 50년대 후반, 이승만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날로 가중되었으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경향신문 강제폐간으로 국내에 언로가 차단되자 그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으로 한국 소식을 외부에 알리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군부쿠데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또 베트남 전쟁의 살상을 파헤쳐 박 정권의 눈엣가시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중앙정보부는 그에게 베트남전쟁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를 몇 번 써주면 월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돈을 주겠노라고 제의했지만 그는 끝내 이를 거절했다. 이 일로 다니던 조선일보에서도 쫓겨났는데, 당시 그는 제기동 미나리밭 옆 13평짜리 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글 때문에 다니던 신문사와 대학에서 각각 2차례 해직되었고, 총 5차례 구속됐었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의 그의 투철한 기자정신은 상으로 보답되기는 커녕 필화사건으로 엮여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생전에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 추구”라고 쓴 바 있다.
최근 ‘리영희 평전’을 펴낸 김삼웅씨는 그의 글쓰기 자세를 두고 “종교적 엄숙주의에 가깝고 진실 추구의 의지는 혁명가에 가까웠다”고 적었다.
보도는 논평과 다르다. 기자는 사실(Fact) 보도에 충실해야 한다. 요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이른바 소셜미디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매체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기성 매체에 대한 실망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언론인 리영희를 우리가 다시 기억해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