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琉球)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이다. 유구는 17세기 일본이 강제로 점령할 때까지 독립된 국가였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상호 간에 사신을 파견하며 친근하게 지냈다. 우리나라가 유구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문화적으로 남방의 문물을 직수입하는 경제적 이득이 있었으며, 배를 타고 활동하던 사람들이 표류했을 경우 그 표류인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는 유구국의 사신을 일본의 사신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유구국도 분열해 삼국시대가 있었는데, 산남(山南), 산북(山北), 중산(中山)의 삼산왕조(三山王朝) 시대로 약 40년간 계속됐다. 이때 유구국의 산남왕과 중산왕은 동시에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구국의 중산왕이 태조 3년(1394)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치고, 표류했던 우리나라 남녀 12명도 돌려보내며 우리나라에 망명해 온 산남왕을 보내 달라고 청했다. 조선에서는 산남왕을 돌려보내지 않고 경상도 진주에 살게 했으며 해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태조 7년(1398)에 죽었다. 유구에서는 1429년에는 중산왕이 산남마저 정복해 삼산 분열 시대를 끝내고 유구를 통일했다.
이와 같이 유구국이 분열돼 있을 때 유구국의 하나인 산남왕이 우리나라에 망명해 와 살다 죽었다. 약 5년간 우리나라에 살았으므로 혹시 그때 남긴 유구국 국왕의 후손이 진주에 남아 있지 않을까?
유구국은 그 후 1609년 에도막부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쓰마번의 침입을 받고 그 지배 아래 놓인다. 1872년에는 유구번(琉球藩)으로 격하됐고, 1879년 군대와 경찰의 동원 아래 유구 국왕이 폐위되고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개칭됐다. 오키나와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에는 미국이 점령하고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됐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