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양에 잠시 머물렀다. 빛 광(光)자에 볕 양(陽)자를 쓰는 이 동리는 그 이름대로 햇살이 하늘에서 실타래가 풀린 것처럼 거침없이 쏟아진다고 한다. 해안을 끼고 흐르는 바닷물은 연중 따뜻한 난류다. 살기가 좋다는 뜻이다.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치면 여기는 가야의 역사가 뿌리 박혀 있다. 조만간 광양만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오가는 뱃길이 열린다고 하니, 가야와 왜의 교류사가 오늘에 와서 새로운 그림을 그릴 터이다.
몇 번 스쳐 지난 적은 있으나 주변을 돌아볼 기회는 처음이었다. 그곳 젊은이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던 것도 감사하거니와 섬진강을 따라 둘러본 경치에도 마음이 흡족해진다. 섬진강 하구와 남해가 마주치는 곳은 조류에 따라 바다가 되기도 하고 강이 되기도 한단다. 역사의 흐름이 이곳에 어떤 격변을 남겼는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듯 싶었다.
제2 포스코가 광양의 현재를 말하고 있지만, 그에 앞서 이곳에 숨 쉬고 있는 향토사의 흔적이 더욱 궁금했다. 남으로는 남해와 여수가 코 닿을 데이고, 북으로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만(灣)을 낀 마을이다. 왼쪽으로 돌면 구례와 순천으로 나뉘고 더 가면 벌교와 보성,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하동과 진주가 언덕 너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벌교를 뿌리로 한 빨치산 호남의 역사를 다루었다면, 이병주의 ‘지리산’은 하동에 맥을 둔 빨치산 영남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오르면, 동학의 잔병들이 숨어들었던 곰골(웅동·熊洞)이 지척이고 민비시해범을 살해한 한 아무개가 그곳에 또한 은거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다시 역사의 말머리를 훌쩍 일제시대로 돌려보면,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을 포함한 그의 원고를 맡긴 전설 같은 국문학사의 기억이 이곳에 깊게 스며 있다.
윤동주의 원고가 8년간 보존되어온 그의 집이 광양해안가에 아직도 서 있기 때문이다. 훗날 서울대 교수로 국문학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던 정병욱이 아니었다면 윤동주는 우리의 삶에서 영원히 유실될 뻔했다. 백두대간의 북쪽 끝과 남쪽 아랫자락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자칫 가려질 운명에 처했던 역사의 햇살을 보존했다. 우린 향토사의 보물들을 아직도 땅속에 묻어놓고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살고 있진 않을까?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