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한국 나이로 마흔에 입성했다.
꺄아악∼. 대체 이 나이를 두고 누가 불혹이라고 하는 걸까. 아무도 ‘혹’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혹’이라는 뜻이 가장 정확할 듯싶다. 한두 살 적은 미혼의 후배들도 이미 마음만은 지레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이 나이 되면 매사에 심드렁, 만사가 시큰둥하다니깐요.”
어째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토로한다. 날씨가 좋아도 어디 특별히 놀러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돈이 있어도 특별히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한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이미 충족된 상태라 사치스러운 고민으로 들리지만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사실 그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욕구, 욕망, 욕심? ‘욕’이 있어야 인생이 신나지니까.
서른으로 넘어가려는 20대들은 서른 너머의 안정을 꿈꾼다. 왠지 서른이 넘으면 불안감과 과다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만 같다. 하나 마흔으로 넘어가려는 30대들은 어째 다들 분위기가 심란하다. 왜 그렇게 다들 마흔 살을 싫어할까. 정확히 마흔의 어디가 나쁜 걸까, 싶어 주변에 물어봤더니 ‘더 이상 장래희망이 없다’ ‘나름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다’ ‘그 어떤 연애의 가능성도 없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보다 나이가 많다’라고 한탄한다. 배우 안성기가 성숙한 조연으로 물러나 줘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주인공이었을 20∼30대 시절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말 주인공답게 살았나 의문스럽다. 여든까지 산다는 이 시대에 20∼30대라는 시절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짧은 찰나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20∼30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내는 것’에 가까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절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와 책임과 제약이 유난히 많다.
그렇게 치면 10대들은 편한가?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은 또 어떻고? ‘딱 좋은 나이’가 딱히 몇 살이라고도 이젠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오오, 이렇게 정리하니 조금 불혹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한 착각이 든다. 어차피 행복은 착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