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줄로 접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몽상가’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머무르기를 즐긴다. 영화배우 이경영(51)이 2002년 ‘그 일’ 이후 10여년만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국형 액션 누아르 주역
1990년대의 한국영화계는 이경영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테러리스트’와 ‘게임의 법칙’으로 상징되는 한국형 액션 누아르의 시작이 그의 연기에서 비롯됐다. ‘세상밖으로’도 있다. 배우들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욕과 비속어를 마음껏 내뱉었던 작품.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많게는 한해 다섯 편까지 출연하던 시절이었다.
편수가 많다 보니 걸작과 졸작이 마구 뒤섞였다. 제작자와 감독이 축 처진 어깨와 슬픈 눈으로 찾아와 출연을 간청하면 그 자리에서 홀딱 넘어가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귀가 얇아서였죠. 그것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요 모양새가 됐지만요.(웃음)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제 팔자려니 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날의 그 사건까지도요….”
사람좋고 귀얇아 '말썽'도
2002년 5월 악몽과도 같았던 일이 터졌다.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청소년 성매수 혐의로 철창 신세를 졌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이미 이경영이란 이름은 부도덕한 연예인의 대명사로 굳어지고 난 뒤였다.
변호사로 일하는 한 후배는 선배의 이같은 가슴앓이를 보다못해 불과 몇 년전까지도 사건 당시 상대의 거짓말과 경찰 수사의 일부 부당했던 대목을 법정에서 정식으로 따져자고 권할 정도였다. 당연히 거절했다. 아니 말렸다.
5년전 상대로부터 정식으로 사과를 받았다. “미·안·했·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만 나왔다. 그를 따르는 후배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몇몇 동생들은 술자리에서 “형, 절대로 이상한 생각(자살) 품으면 안돼”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애기를 할 때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마구 꾸짖죠. 그런데 혼내고 나면 제가 너무나 한심스러워진다는 거죠. 누구한테 뭐라 말할 자격이 있을까, 자문자답합니다. 이제는 지난 일이라고 잊고 살지만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고는 글쎄요….”
날 일으켜준 선후배들
조용하게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폭행 시비에도 휘말렸다. 역시 인정 많고 술 좋아하는 성격때문이었다. 이처럼 한 번 찍힌 낙인은 악재를 반복하며 더욱 커져갔다.
2006년 함께 살던 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절친한 동료와 선후배들만이 곁에 남았다. 그를 ‘따거’로 부르는 김민종은 복귀를 돕는데 앞장섰다. 한 번은 모 유명감독의 영화 캐스팅 제의를 받는 자리에서 “이경영과 함께가 아니라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제외된 적도 있다.
20일 소규모로 개봉되는 저예산 코믹 스릴러 ‘죽이러 갑니다’의 박수영 감독도 쓴소리를 주고받는 사이다. 자신을 해고한 사장을 상대로 잔인한 복수극을 벌이는 노동자로 출연했는데, 박 감독이 “죽이는 시나리오를 쓰면 선배님을 제일 먼저 캐스팅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면 “정신차려. 나보다 더 좋은 배우를 출연시켜야지”라고 질책을 서슴치 않는다.
쉰 넘어 돌아온 '로맨스 가이'
반백이 된 머리와 두둑해진 뱃살에 깜짝 놀라는 팬들이 많다. 오십이 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더 놀란다. 대중은 여전히 그를 ‘로맨스 가이’로만 기억하고 있어서다.
일흔 정도 됐을 때 정말 좋은 배우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 조금 심드렁해졌을 법도 하건만, 연기에 대한 마음은 갈수록 경건해진다. 영화 출연이 무서워지는 까닭이다.
이경영을 불러내려는 러브콜은 최근 들어 잦아지고 있다. 황정민 주연의 ‘모비딕’에서는 음모론의 중심을 차지한 ‘거대악’으로, ‘카운트다운’에서는 전도연에게 사기 비법을 전수하는 사부로 각각 출연중이다. “그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 출연을 결심했을 뿐,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연기를 말할 때만큼은 촉촉한 눈망울이 반짝 빛난다.
이제 이경영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다. 사진/한제훈(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