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책, 갈피’는 오래된 책 속에서 언제 꽂아두었는지도 모를 추억의 물건을 발견할 때와 같은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아픈 기억도 추억의 옷을 입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오히려 아픈 기억일수록 추억의 맛은 진하다.
‘책, 갈피’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봄직한 진로의 고민과 첫사랑의 아픔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일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 후 추억의 옷을 입은 기억에서는 훈훈한 향기가 난다.
무대는 대전의 한 동네 서점이다. 이곳에서 중학교 때부터 어울려온 친구들이 꿈과 사랑을 키워가며 성장한다. 시와 소설책을 좋아하지만 학교 공부에 쫓겨 마음껏 책을 보지 못하는 재경, 이런 재경을 질투하며 오직 학업에만 몰두하는 지혜, 재경을 좋아하며 작가를 꿈꾸는 영복, 영복을 짝사랑하는 당찬 소녀 보경, 책방 일을 돕는 마음 착한 재수생 현식,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서점누나 지현.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서점을 매개로 이들이 사춘기 중학생에서 어엿한 사회인이 될 때까지의 중요 순간이 전개된다. 소설책 대신 성문종합영어를 택한 재경은 서울대에 들어가 유학을 갔고, 작가를 꿈꾸던 영복은 제대 후 꿈을 접고 취업을 한다. 또 보경은 보경대로 지혜는 지혜대로 그들의 삶을 선택한다.
그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삶은 예측한 대로 또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대로 전개된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이 작품의 제목이 ‘책갈피’가 아닌 ‘책, 갈피’인 이유는 선택을 위해 포기한 삶의 여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복이 보경의 사랑을 받아주었다면, 재경이 성문종합영어 대신 소설책을 읽었다면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삶은 이처럼 선택한 것과 동시에 포기된 것이 있어 아련한 여운을 만들어낸다. ‘책, 갈피’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였던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재경과 영복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작품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창 다양한 것을 받아들일 나이에 오로지 학업에만 충실하기를 강요하던 우리의 교육 제도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 갈피’는 그것마저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착한 연극이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느슨한 구조마저도 여유있는 마음으로 눈감아주게 하는 착한 연극. 2월 27일까지 상상아트홀 블루. /박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