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정부가 ‘비자금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달부터 시행되는 ‘독재자 재산반환법’도 그런 조치의 일환이다. 이에 따라 최근 튀니지 민중시위로 쫓겨난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과 대선 결과에 불복해 내전상태를 빚고 있는 코트디부아르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의 은행 계좌가 전격 동결됐다.
지난해 지진피해를 입었던 아이티의 장-클로드 뒤발리에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에 대해서도 비슷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지난날 독재자들이 몰래 이용하던 스위스 은행의 비밀금고가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스위스 은행이 ‘검은 돈’의 은닉처로 각광을 받았던 것은 “고객의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 철저한 보호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계좌의 비밀은 법에 의해 보호됐다. 그러나 이란의 팔레비 대통령을 포함해 파나마의 노리에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필리핀의 마르코스 등 독재자들의 부정축재 자금이 스위스 은행에 숨겨졌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스위스 정부는 각국으로부터 고객보호 규정을 완화하라는 압력에 부닥쳐 왔다.
이런 상황에서 카리브해의 케이먼 제도에 설립된 스위스 은행 비밀고객들의 명단이 조만간 폭로될 예정이어서 또다시 돌풍이 휘몰아칠 조짐이다. 율리우스 바에르 은행에서 근무했던 루돌프 엘메르가 문제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지난날 큰손들의 은밀한 예탁 업무를 취급했던 그는 최근 인터넷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2000여 명의 고객 정보를 넘겨주었다. 여기에는 각국의 정치인, 기업인, 예술가 등 유명 인사들이 두루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케이먼 제도 역시 예금주에 대한 비밀이 보장되는 한편 세금도 거의 물리지 않기 때문에 각국에서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임은 물론이다. 현재 8만 개 안팎의 회사가 세워져 있어 5만 명 선인 전체 인구를 훨씬 웃돌고 있다. 기업들은 여기로 소재지를 옮긴 뒤 수수료만 내고는 마음대로 자금을 굴리면서 세금을 포탈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세 피난처’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밖에 바하마를 비롯해 버진아일랜드·벨리즈·파나마 안도라·리히텐슈타인·모나코·나우루 등도 비슷한 범주로 분류된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보장 원칙이 점차 허물어지면서 비자금 뭉치가 이들 은행의 개인금고로 옮겨 가는 추세다. 고객 관리가 베일에 가려 있으며 특정 고객만을 대상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과연 어느 정도의 비자금이 숨겨져 있는지 짐작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들 비밀금고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릴 날도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