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단정한 이미지를 자랑하는 배종옥(47)이 20일 개봉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가족의 사랑을 뒤로 하고 암에 걸려 숨지는 엄마로 나온다. 살짝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본인도 이같은 시선을 잘 알고 있는지 “영화에서 엄마로 출연하기는 ‘안녕, 형아’와 ‘허브’ 이후 세 번째이지만, (엄마로 캐릭터가 굳어질까봐) 약간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고민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 그 어느 여배우보다 ‘엄마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조성준기자 when@metroseoul.co.kr
원칙 깨고 겹치기 출연
출연 제의를 고민한 이유는 또 있었다. 겹치기 출연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도 망설이게 했다. SBS 일일드라마 ‘호박꽃 순정’에만 충실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정말 좋아 마음을 바꿨다. 연출자인 민규동 감독(‘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다. 촘촘한 드라마 제조 능력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심하고 나니 원작인 15년전 드라마에 대한 부감감도 떨쳤다. 주인공 인희의 어떤 면을 끌어낼 것인가에 집중하면서부터 가로막고 있던 벽은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물론 겹치기 출연으로 인한 체력적 부담은 극심했다. 촬영 초반부 낮에는 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세트장으로 직행해 밤을 새는 날이 이어졌다.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는 장면은 오후8시부터 다름날 오전4시까지 촬영을 강행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지쳐 말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가족사랑 일깨우는 작품
극중 인희는 가족의 무관심과 암이란 두 가지 적과 싸운다. 그러나 생을 마감할 무렵에는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도 2년반동안 암으로 투병하다가 몇 년전 사망했다. 대체의학의 도움을 받아 고통없이 숨졌지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진다. 떠날 때를 미리 알고 있던 어머니와 가족들이 사랑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그같은 경험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연기하면서 어머니가 말년을 보내던 모습이 자주 떠올라 많은 도움을 받았죠. 일부러 제작진 출연진과 합의했던 게 ‘우리끼리 먼저 너무 슬퍼하지 말자’였어요. 실제의 저도 그랬지만, 막상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눈물이 자주 나지 않거든요. 감정을 억누르려 모두가 애썼어요.”
촬영을 마치고 때로는 피곤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일쑤였던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지난해 연말 가족을 불러모아 정겨운 자리를 마련했다. 영화가 안겨준 ‘세상에서 갸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한때 '발연기' 타박 들어
연기를 시작한 지 올해로 26년째다. 3년째까지는 ‘연기 못한다’는 타박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문희 윤여정같은 선배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의 조언과 더불어 가장 큰 버팀목은 뭐니뭐니해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다. 배우란 직업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촬영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워커홀릭이란 별명을 듣곤 해요. 그런데 연기할 때가 가장 좋은 걸 보면 ‘내가 정말 배우하길 잘했구나’란 생각이 들죠. 솔직히 힘들기도 해요. 카메라앞에서 혼자일 수밖에 없는 배우는 정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너무 외로운 직업입니다. 지나고 나면 다 기분좋은 추억으로 남지만요. 하하하.”
언론학 박사답게 젊은 날 자신처럼 연기로 고민중인 후배들을 위해 훗날 연기 지침서 혹은 배우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드라마의 발자취를 집필할 계획도 있다. “조언이 절실한 후배들한테 뭔가 남겨주고 싶다”는 표정에서 선배의 따뜻한 사랑이 묻어난다. 사진/최현희(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