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주혁은 ‘차도남’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의외로 솔직하고, 내면엔 여린 면도 가지고 있다. 올해 마흔이 됐다는 그가 지난달 개봉한 영화 ‘적과의 동침’과 14년 차 배우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정려원 다시 봤어요”
지난해 ‘방자전’의 방자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순수한 시골마을 주민과 인민군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적과의 동침’을 차기작으로 택했다. 첫사랑의 순정을 품고 석정리를 찾은 인민군 장교 정웅 역으로 변신,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내면의 감정 사이에서 번민하며 극을 이끈다.
영화만 봐도 그간의 고생이 눈에 훤하다. 지난해 5개월 동안 지방에서 더위·추위와 싸워 가며 전투적으로 촬영했다는 그는 “다른 영화보다 무려 5배나 많은 필름이 사용됐다”며 고생담을 털어놓았다. 실제 북한 장교 출신에게 북한말도 배웠다.
“엄청 고생을 해서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었어요. 대신 집요하게 작품을 파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죠. 제게는 좋거나 나쁜 작품의 구분이 없어요.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됐죠. 매 순간이 터닝 포인트예요.”
극에 꼭 필요한 로맨스가 없었다는 아쉬움도 숨기지 않은 그는 정웅의 첫사랑인 순박하면서도 당돌한 석정리 신여성 설희 역의 정려원에 대해 “특이한 친구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가슴으로 연기하는 배우였다”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연기해서는 안될 피”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낮췄다. 원로배우였던 고 김무생의 아들인 그가 스스로를 “연기자를 해서는 안 될 피”라고 했다. 감성적이 아닌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는 배우인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와 고집이 있다는 면이 닮았어요. 아버지도 평생 이 일밖에 못하셨으니까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연기하셨는데, 힘드셨다기보다 행복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촬영장에 있을 땐 즐거우니까요.”
미혼인 그에게 만약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이 배우를 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최근 오랜 연인 김지수와 결별한 그는 대중에게 연애 등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아온 듯했다.
“하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반대할 거예요. 일할 때는 즐겁지만 그다지 행복한 삶은 아니니까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무엇을 해도 편하지 않죠. 이런 점 때문에 제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게 된 것 같아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야 행복해질 것 같아요.”
“배우라서 행복해요”
연기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푸념해도 이 일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 연기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 때문이다. 평소 느끼지 않는 감정과 하지 않는 행동을 연기할 때, 마치 실제 자신의 것 같은 짜릿함이 있다.
배우로서 거창한 목표나 추구하는 캐릭터는 딱히 없다. 1998년 SBS 8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 ‘사랑따윈 필요없어’ ‘아내가 결혼했다’ ‘방자전’ 등으로 조금씩 연기 폭을 넓혀왔다.
“후배들을 보면 다양한 연기를 하겠다며 대변신을 꾀하는데 어색할 때가 많아요.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각인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폭을 넓히다 최종적으로는 어떤 배역을 맡아도 다큐멘터리 같은 연기를 펼치고 싶어요. 자연스러운 모습이요.”
그는 ‘적과의 동침’에 이어 야구선수로 분하는 ‘투혼’으로 연기 활동을 이어 간다. 서두르지 않고 차츰 차츰 나아가는 모습에서 그의 아버지처럼 20년 후 머리카락이 희끗한 채로 관객 앞에 선 김주혁이 떠올랐다.
사진/최현희(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