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작품에 이 배우가 없으면 어딘지 이상하다. 드라마 ‘시크릿가든’과 ‘짝패’, 영화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고지전’ ‘7광구’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 명품 감초배우 정인기(45)의 최근 활약상이다. “편수가 많은 게 꼭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어다녔다는 증거”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표정에서 묵묵히 연기 외길을 걷는 쟁이의 자부심이 읽힌다.
#올해 벌써 5편 얼굴
2008년 MBC ‘출발 비디오 여행’이 최다 출연 배우로 선정했다. 그해 무려 12편의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추격자’의 형사 역을 계기로, 한 번을 나와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나 같은 조연은 드러나지 않게 주인공을 충실히 보좌하는 것이 주 임무다. 튀는 연기는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 영화계의 거품이 빠졌던 2000년대 중반 제작 편수가 급감하면서 생활고를 겪었다.
그래서일까, 생계형 배우라고 놀림받을지 몰라도 여기저기에서 찾는 지금이 행복하기만 하다. ‘시크릿가든’과 ‘짝패’, ‘고지전’의 촬영 일정이 겹쳐 전국을 오가던 1월, 파김치가 될 만큼 힘들었지만 예전을 떠올리며 표정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즐겁게 연기했던 이유다.
#단편영화로 내공 쌓아
서울예대(구 서울예전) 연극과를 졸업하고 1990년 민중극에 투신했다. 모두가 영차영차 힘을 합친 문화 운동으로 사회를 바꿔보고 싶었다. 당시 함께 몸담았던 동료들로는 정진영·박철민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들어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영화 연기가 절실했으나, 기회를 찾지 못한 정인기에게 예비 감독들이 연출하는 단편영화는 좋은 실습 공간이었다. 단편영화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신재인 감독의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박신우 감독의 ‘미성년자 관람불가’와 ‘불법주차’ 등에서 잇따라 주연을 맡으면서 유명 감독들이 서서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6월에 열렸던 제10회 미장센 단편영화제는 영화제를 빛낸 배우로 그를 선정해 공로상 개념의 특별전을 개최했다.
#드라마 파급력 실감
드라마의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실감한 건 ‘시크릿가든’이었다. 길라임(하지원)의 아빠를 연기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시청률이 정점으로 치솟을 무렵 ‘고지전’의 촬영장인 전남 고흥의 한 식당에서였다. 손님들이 주연인 신하균과 고수는 제쳐두고 한꺼번에 사인을 요청해왔다.
“솔직히 어리둥절했죠. 이래서 드라마에 출연하는구나 싶었어요. 올해로 연기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어디를 가면 길라임 아빠로만 불러주니 조금 난감하긴 합니다.”
현빈·하지원과 얼굴을 익힌 것도 작은 소득이었다. ‘7광구’를 먼저 끝내고 ‘시크릿가든’에 캐스팅됐는데, 촬영장에서 ‘7광구’에 이어 하지원이 딸이란 사실을 알고 둘 다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홉살배기 딸이 ‘시크릿가든’ 종영 파티에 가려는 제게 현빈 사인을 받아오라며 명령을 내리더군요. 사인을 갖다줬더니 정말 좋아하는 모습에 아빠 된 도리를 다한 것같아 내심 흐뭇했답니다.”
#김지훈 감독 페르소나
요즘은 영화 ‘타워’와 ‘시체가 돌아왔다’를 촬영 중이다. ‘타워’는 ‘7광구’를 연출한 김지훈 감독의 신작으로, 정인기는 박철민과 더불어 김 감독이 이제까지 메가폰을 잡은 영화 네 편에 모두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 감독님은 민중극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오래전 무대에 선 박철민씨와 저를 보고 ‘나중에 이 배우들과 함께 일해야지’란 생각을 품었다고 하더군요.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앞으로 욕심이 있다면 좀 더 밀도있고 디테일이 살아숨쉬는 연기를 해 보고 싶은 것이다. 한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연기할 수 있는 단편영화에 여전히 끌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출연 편수가 많으니까 떼돈을 번 줄 알더라고요. 형편이 조금 나아졌을 뿐,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저를 위해 묵묵히 참고 기다려준 아내와 딸이 지금보다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열심히 연기하면서, 작품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