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낯은 익지만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영화 '과속스캔들'에서 여주인공 정남(박보영)의 찌질한 남자친구를 연기했고, 드라마 '역전의 여왕'과 '최고의 사랑'에서는 촐싹대지만 의리있는 비서와 한결같은 마음씨의 매니저로 각각 출연했다. 이 쯤 되면 알 것같다. 임지규(34)다. 다음달 중순 영화 '봄, 눈'의 개봉을 앞둔 그는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씩 웃었다.
▶ 눈빛으로 뭔가 다른 대선배님들
시한부 인생인 엄마와 가족의 가슴아픈 이별을 그린 '봄, 눈'에서 대선배 윤석화·이경영을 부모로 만났다. 극중 1남2녀 가운데 막내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20대 아들을 연기했다.
윤석화의 아들로 캐스팅됐다는 얘기에 처음엔 긴장했다. 연극계의 '대모'로 워낙 유명한데다, 후배들한테 엄격하고 무서운 성격이란 귀띔을 들어서였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촬영 시작전 전체 리딩 자리에서였어요. 선배님께서 먼저 다가와 제가 당신 아드님과 생일이 같다며 무척 기뻐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프로필에 나와있는 제 생일은 음력이라 실은 다를 수도 있었거든요. 하하하. 촬영 기간만큼은 서로를 정말 엄마로, 아들로 대했습니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의 간판이었던 이경영과 만난 것도 깊은 감동이었다. 한 번은 마주한 이경영의 깊은 눈빛에 주눅이 들어 NG를 연발했다. 그러자 이경영은 "내 눈치 보지 말고 네가 그냥 느끼는대로 연기해"라고 슬쩍 조언을 건넸다.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긴장이 풀렸다. '나도 나중에 후배들에게 저런 선배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 부산 출신…고향같은 독립영화
지난해 드라마 두 편으로 얼굴을 널리 알렸지만, 실은 독립영화계가 낳은 스타다. 2007년 독립영화 최고의 수확으로 평가받는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와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의 주연으로 젊은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받는 얼굴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라 군 제대후 23세 때 서울로 올라왔다.모 방송사의 탤런트 공채 시험에 응시했지만 시원하게 미역국 한 사발을 들이키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들의 연출작으로 눈을 돌린 게 계기였다.
자신처럼 독립영화를 발판삼아 활발하게 활동중인 정인기·조성하같은 선배들을 만나면 즐겁고 기쁘다. "잠깐 출연한 '화차' 촬영장에서 '저수지…'로 처음 인연을 맺었던 조성하 선배님을 뵙고 얼마나 기쁘던지요. 독립영화에 빚진 게 너무 많아요. 지금보다 유명해지더라도 독립영화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겁니다."
▶ 영화·드라마…장르 안가리는 체질
물론 드라마도 소홀히 하지 않을 계획이다. '역전…'와 '최고의…'에 출연하기 전만 하더라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드라마 촬영장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난 영화 체질'이라고 섣부르게 판단을 내린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남주와 박시후('역전의…'), 차승원('최고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서다. "세 분은 TV 연기의 숨은 재미를 가르쳐 주셨어요. 비록 이것 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좋은 드라마가 있으면 계속 출연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봄, 눈'의 흥행 성공이 가장 우선이다. 이제까지와 달리 코미디 등 자극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처음으로 시도한 연기 변신까지 인정받는다면 금상첨화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설 때,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전화 한 통을 드리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같다"고 덧붙였다. 사진/최현희(라운드테이블 디자인/양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