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뜨내기 막장 인생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모여들었던 탄광촌, 폐광된 이곳에 거대한 카지노가 들어서고 또 다른 헛된 꿈을 꾸는 인생들이 몰려든다.
연극 '878미터의 봄'은 폐광촌에 들어선 카지노가 배경이다. 17년 전 탄광의 매몰 사고로 광부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과 그것을 부채로 떠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난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죽은 광부의 아들 준기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모처럼만의 방문에 반가워하면서도 준기의 눈치를 살핀다. 고향을 떠나기 전 좋아했던 우영도 어른들처럼 준기를 반가워하지 못한다.
17년 전 매몰 사고가 발생하자 살 확률이 적다고 판단한 마을 사람들이 구조 작업을 하지 않고 가짜 장례를 치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878미터 막장 속에 진실을 묻어둔 채 죄의식으로 막장보다 먹먹한 삶을 살아간다.
지하 깊은 막장에 이해타산으로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한 광부의 죽음이 있다면 고공 크레인에는 농성 중인 김철강이 있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찍은 준기는 1회 방영 이후 2·3회가 외부 압력에 의해 방영되지 못하자 다른 소재를 찾아 고향인 카지노로 온 것이다. 준기 역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마을 어른들과 다르지 않다.
이 연극은 죽음을 방치하고 외면한 자들에게 회피하지 말고 그 진실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그래서 제목의 '봄'은 계절 '봄(spring)'과 '바라봄(sight)'의 중의적인 의미를 담는다.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세상과 격리된 카지노에서 청춘을 묻어버린 우영이 아버지의 죽음을 회피하려는 준기에게 건네는 대사 "적어도 너라도 지켜봐야 하는 게 아닐까"는 바로 작가가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여겨진다.
문학적 대사와 일상적 대사의 혼재, 현재와 과거를 비현실적으로 넘나드는 구조, 진실을 외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바람난 아내의 사망 보험금을 다 써버리려고 온 석우의 이야기까지 뒤섞어 복잡하다.
장면 전환도 매끄럽지 못하다. 그럼에도 시의적절한 질문을 담았으므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음달 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박병성 '더 뮤지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