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연륜이 쌓일수록 화법과 작품 세계가 단순 명쾌해진다는 것이다.
괜한 트집을 잡으면 대중에 영합한다는 뜻이고 좋게 보면 잘난 척을 삼가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텐데, 그들의 젊은 날만 기억해 다가가기 힘들었던 이들에겐 반가운 변신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지식인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우디 앨런도 비슷한 경우다.
나약하고 힘 없는, 그러나 두뇌와 입담은 뛰어난 뉴요커의 눈으로 50년 가까이 거의 매년 한 편씩 연출과 주연을 겸해오며 꾸준히 활동해 온 팔방미인이지만, 잰 체하는 듯한 모양새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많았다. 예술가의 지적 과시를 유독 못마땅해하는 국내 관객들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5일 개봉될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앨런 감독에게 품고 있었던 그동안의 선입견을 없앨 좋은 기회다. 초창기의 '돈을 갖고 튀어라' '사랑과 증오' '섹스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 등과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까진 아니더라도 아주 편안하고 흥겹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가 길(오언 윌슨)은 약혼녀 이네즈(레이켈 맥애덤스)와 파리 여행을 떠난다. 평범한 관광객들마냥 명소 구경과 사진 찍기에만 몰두하는 이네즈에게 실망한 길은 홀로 밤거리에 나섰다가 택시를 잡아탄다.
놀랍게도 택시는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길은 바람둥이 피카소와 마초 훼밍웨이, 괴짜 스콧 피츠제럴드 등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전설의 예술가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게 된다. 이 와중에 피카소의 연인인 애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아르)와 사랑에 빠지는 행운까지 얻는다.
물론 70대 노장이 '그때가 좋았지'란 노스탤지어의 시선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다소 구태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예술적 영감을 줄 수 있는 도시는 이제 뉴욕이 아니라 파리'라고 살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위인전에서나 접했던 당대의 예술가들로부터 보편적인 재미를 이끌어내는데 있다. 자의적 해석보다는,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에 근거해 캐릭터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역시나 노련하고 유쾌하다.
웃기는 연기만 잘하는 배우로 인식됐던 오언 윌슨은 앨런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손색이 없다. 나서기는 싫어하지만 은근히 잘난 척하고 싶어하고 뒤끝 있는 '먹물'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
이번 주말엔 극장으로 파리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