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과 거리를 두고 살던 조민수(47)가 한국 영화계의 '이단아' 김기덕 감독과 손잡고 '피에타'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뭐가 됐든 물건이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같은 기대는 '피에타'가 29일 개막된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에 진출하면서 사실로 입증됐다. 다음달 3일 베니스 출국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민수는 "레드카펫에서 주눅 들지 않으려 벌써부터 노력중이지만, 막상 서게 되면 조신하게(?) 인사만 하고 끝낼 것같다"며 깔깔댔다.
- 영화 나들이는 참 오랜만이다.
2005년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박해일의 엄마로 특별 출연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지난해 '써니'에선 사진으로만 나왔고…. 제대로 된 출연은 1995년 '맨' 이후 17년만이다. 어휴, 세월 참 많이 흘렀다.
- 중학교 시절 소설로 먼저 읽고 영화로 봤던 '청, 블루 스케치'에서 천호진·허준호와 연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영화가 스크린 데뷔작이었다. 연소자 관람불가였는데 관람했던 걸 보니 조숙했나 보다. (웃음) 정확한 개봉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데, 87년 쯤이었던 걸로 안다. 이후 90년에 출연했던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를 끝으로 드라마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 왜 그랬나? 그때만 해도 도발적이고 똑 부러지는 신세대 미인의 상징이었는데.
한국영화의 트렌드가 청춘물에서 에로물로 바뀔 때였다. 이미지때문이었는지 받는 시나리오마다 벗는 장면이 많았다. 솔직히 노출이 두려웠고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드라마나 하자'고 마음먹게 된 계기였다.
- 포르노 배우 지망생으로 출연했던 여균동 감독의 '맨' 이후에도 안방극장에만 머물렀다.
90년대 초반 장선우·박광수·여균동 감독같은 분들이 등장하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앞세운 한국영화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맨'으로 돌아왔지만, 과정과 결과 모두 내가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라 실망했다. 다시 드라마로 갈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에 돌아온 영화 촬영 현장은 낯설지 않았나?
전혀! 의외로 적응하기 쉬웠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김기덕 감독의 촬영장은 드라마보다 더 바쁘게 돌아간다.
- 김 감독으로부터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살짝 당황했을 것같다.
가장 먼저 '왜 나지?'란 생각을 했다. 평소 그 분의 영화를 좋아했으면 모를텐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받아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내(이정진) 앞에 갑자기 엄마를 자처하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주인공이 정말 좋았고, 잘 해낼 것같은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다.
- 그럼에도 김 감독 영화의 특성상 연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스포일러같아 모든 걸 밝힐 순 없지만 자칫 근친상간처럼 보일 수 있는, 금기시되는 대목까지 접근하는 장면이 있어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수정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멋지게 연기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랬더니 예상을 깨고 흔쾌하게 내 의견을 받아들여줬다.
- 같이 일해 본 김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
처음 만났을때 "조민수 씨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살짝 기분 상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렇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위해 캐릭터 자체를 손 봤다고 하더라. 겉보기와 달리 무척 유쾌하고 개방적인 성격이다. 국내외의 엇갈린 평가에 다소 서운해하는 심정과 피해 의식이 깔려있긴 하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인데, 우리부터 그 분을 응원하고 아껴야 필요는 있는 것같다.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여자 냄새 나는 배우로 남고 싶다. 농담처럼 즐겨하는 얘기 중에 "딸 시집 보내려 애쓰는 엄마 역은 죽어도 싫다"가 있다. 엄마여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엄마이고 싶다. 또래의 다른 여배우들도 똑같을 것이다. 아마 강부자 선생님도 그럴 걸. (웃음) 삶이 축적될수록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늘어나는데, 우리 연예계는 여배우를 빨리 늙게 하므로 오히려 연기할 기회가 줄어든다. '피에타'로 힘을 얻었으니 버텨볼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 공연하고 싶은 남자배우가 있다면.
드라마 '추노'와 '뿌리깊은 나무'를 보고 조진웅이란 후배가 좋아졌다. 멜로 연기를 참 듬직하게 하더라. 원빈의 눈빛도 참 멋있다. 어디 원빈의 눈빛에 조진웅처럼 연기하는 배우 없으려나….·/사진/(김도훈)·디자인/양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