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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권기봉의 도시산책] '말죽거리 신화'의 또다른 그늘

'말죽거리 신화'라는 말이 있었다. 지난 1960년대 말 '말죽거리'라고 불렸던 서울 양재역 주변을 중심으로 땅값이 폭등하면서 생겨난 용어다. '강남에 땅을 사지 않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서울에서 돈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너나 없이 투기 행렬에 뛰어 들었다.

'복부인'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때다. 보자기에 현찰을 싸갖고 다니며 부동산 투기에 전념하던 여인들을 가리키던 단어로, 주로 직접 나서서 투기에 가담하기 힘든 고위공무원이나 사업가들의 아내였다. 결국 1966년까지만 하더라도 평방미터당 200~400원 수준이던 말죽거리 땅값이 2년만에 서른 배인 6000 원대까지 오를 정도였다.

제3한강교라 불리던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투기가 과열 양상을 띤 것은 사실 서울시와 정부가 나서서 투기를 조장하고 부추겼기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까지도 투기 행렬에 직접 가담했다. 정치자금 마련에 목적이 있었다.

물론 애초부터 투기를 목적으로 강남을 개발한 건 아니었다. 1960년대 말 서울 인구가 하루가 멀게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군인이 청와대 코앞까지 내려온 '1·21사태'가 도화선이 되었다. 행여 전쟁이 재발하면 피난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서울시민들의 두려움을 떨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강 너머의 강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해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주를 유도했다. 강북에는 더 이상 백화점이나 대형학원, 유흥업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경기고나 서울고 등과 같은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주시키는 식이었다. 그렇게, 무한정 찍어내다시피 하는 아파트에 사람들의 끝모를 욕망이 결합하면서, 말죽거리에서 시작한 개발 붐은 반포와 압구정 등으로 퍼져나가며 강남 일대가 아파트촌으로 변하는 상전벽해의 상황을 몰고 왔다.

그러나 모두가 경제적인 부를 쌓은 것은 아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서울 양재동 212번지에는 '잔디마을'이라는 비닐하우스촌이 있었는데, 그곳에 전기가 들어온 건 지난 2002년, 상수도가 들어온 것도 2004년이 되어서였다. 바로 얼마 전인 지난 15일에는 1968년 빈민운동가 윤팔병 씨가 재활용품 수거와 판매를 통해 노숙인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만든 서울 대치동의 '넝마공동체'가 강남구청에 의해 기습철거되기도 했다. 말죽거리 신화의 이면에 있는, 대한민국의 또다른 풍경이다.

/권기봉 '다시,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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