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을 마친 포도밭. 늦가을 햇살에 포도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심장 '메독(Medoc)'을 가다
'신의 물방울'로 비유되는 와인은 하늘이 내린 선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축복의 땅 프랑스 보르도의 '메독(Medoc) 와인'은 천혜의 자연이 빚어낸 술, 그 이상이다. 이곳의 와인 메이커들은 완벽한 블렌딩으로 모든 떼루아(terroir)를 아우르는 마법의 물방울을 선사한다.
최근 찾은 '메독'은 프랑스 와인의 심장이라 불린다. 보르도시 북서쪽 오메독을 시작으로 마고, 물리스, 리스트락, 쌩쥘리엥, 뽀이약, 생떼스테프, 메독으로 이어지는 8개의 아뺄라시옹(AOC·원산지 통제 명칭)에는 보석처럼 숨겨진 와이너리가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환상의 배합이 만들어낸 '여덟 빗깔' 와인을 전한다.취재협조: 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 www.sopexa.co.kr
프랑스 메독의 포도밭은 지롱드 강을 따라 길게 자리 잡고 있다. 라틴어로 '물의 한가운데(In Medio aquae)'라는 뜻의 지명에서 유래하듯, 메독은 원래 늪지대였다. 땅은 오랫동안 해수의 순환으로 축적된 충적토로, 온통 자갈과 모래밭 투성이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세계적인 와인이 생산된다니 의아했다. 여성 양조학자 카트린 블리망은 "포도나무가 물을 찾기 위해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릴수록 잘 농축된 포도알을 만든다"며 "척박한 메독의 토양과 온화한 기후가 어우러져 '천국의 포도'를 영글게 한다"고 설명했다.
메마른 메독에서 자라는 최고의 품종은 '까베르네 쇼비뇽'으로 진한 루비색과 약간 떫은 맛이 특징이다. 풍부한 탄닌과 탄탄한 구조감으로 숙성 잠재력이 뛰어나 와인을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으로 많이 재배되는 것이 '메를로'. 원만하고 탄닌이 부드럽게 가미된 과일향이 까베르네 쇼비뇽과 어우러져 편안하고 여성스러운 와인을 만든다. 이 밖에 까베르네 프랑·쁘띠 베르도 등을 경작하는데, 와이너리마다 각각의 비율과 양조 방식에 따라 블렌딩해 사용한다.
◆메독을 대표하는 유명 AOC
메독에서 가장 유명한 AOC는 마고. 최상급인 그랑 크뤼 클라쎄 와인이 21개나 속해 있어 자연스럽게 메독을 대표하게 됐다. 흔히 마고 하면 '샤또 마고(Chateau Margaux)'를 떠올리지만, 마고 외에도 가볼만한 와이너리는 넘쳐난다.
▲샤또 라스꽁브의 아름다운 고성. 예약하면 일반 관광객도 묶을 수 있다.
그중 '샤또 라스꽁브(Chateau Lascombes)'는 아름다운 고성에서 하룻밤을 묶으며, 크랑크뤼 클라쎄 2등급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예약제로 운영된다. 마당 한 켠에 있는 비밀 와인셀러도 공개해 세상에 단 4병뿐인 1881년 밀레짐의 와인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샤또 라스꽁브는 메독 와인으로는 드물게 까베르네 쇼비뇽보다 메를로 비율이 높은 와인을 만들고 있었는데, 혀를 조이는 탄닌보다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거실과 침실에는 오래된 가구와 장식품이 그대로 있었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방 저 방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와이너리에 직접 방문하면 숙성 중인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샤또 오브르똥 라리고디에르'의 와인 디렉터가 오크통에서 와인 원액을 뽑아내고 있다.
1964년부터 벨기에인이 운영하고 있는 '샤또 오브르똥 라리고디에르(Chateau Haut-Breton Larigaudiere)'에서는 안내인의 배려로 오크통에서 발효중인 와인 원액을 맛봤다. 포도의 풋풋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숙성이 덜돼 가벼우면서 신맛이 강했다.
병입된 2008년 밀레짐 와인에서는 고소한 토스트 향이 났다. 까베르네 쇼비뇽(85%)과 메를로(15%)를 블렌딩했다는데, 막상 마시자 입 안에서는 향보다 부드러운 탄닌의 여운이 오랫동안 감돌았다.
▲뽀이약 AOC의 '샤또 랭츠 바즈' 양조장은 '와인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옛날에 쓰던 양조 기구를 그대로 전시해뒀다.
메독의 허리를 맡고 있는 뽀이약 와인 역시 명품으로 꼽힌다. 그중 '샤또 랭츠 바즈(Chateau Lynch-Bages)'는 1855년 등급 제정 당시 그랑 크뤼 클라쎄 5등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2등급의 대우를 받고 있다. 양조장 2층에는 옛날부터 쓰던 양조 도구를 전시, '와인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다. 와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꺄즈 가문이 소유주로 인근에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을 세우고 바즈 마을을 만들었다.
특히 기념품 가게는 예쁜 엽서에서 그릇, 책, 따뜻한 목도리까지 눈길을 사로 잡는 아이템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와인 잔은 물론 받침, 오프너까지 관련 액세서리도 다양하다. 독특한 아이템이 많아 2층까지 돌아보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샤또 레오빌 뿌아페레'의 오너 '디디에 뀌블리에'가 시음할 와인을 열고 있다.
쌩쥘리엥 AOC의 '샤또 레오빌 뿌아페레'는 1638년 루이 13세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와이너리로 기업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직접 안내에 나선 와이너리 오너 '디디에 뀌블리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품질은 뛰어나다"며 "최근 10년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갑자기 '좋은 와인'에 대한 현지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일반 사람들처럼 유명한 샤또의 와인, 비싼 와인이라면 덮어 놓고 좋아할까. 아니면 와인의 종주국답게 좋은 와인을 고르는 뚜렷한 기준이 있을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프랑스 와인 중에 나쁜 와인은 없습니다. 특히 메독 와인처럼 어느 정도 퀄리티가 보장된 와인이라면 그 이후는 개인의 '취향' 문제지요. 기분 좋게 즐기면 그게 좋은 와인입니다."
◆작지만 고품격 와인 생산
리스트락, 물리스 AOC는 작지만 명품 와인 못지 않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
▲리스트락 AOC의 '샤또 퐁레오' 와이너리 소유주.
'메독의 지붕'이라 불리는 리스트락 AOC의 '샤또 퐁레오' '샤또 레스따즈'는 1855년 시작한 등급제(크뤼 브르주아)에 못들어 갔지만 그만큼의 퀄리티를 가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곳의 와인 메이커는 스스로 '포도 농사꾼'이라 소개하며 와이너리 곳곳을 안내했다.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아기자기한 와인 장식장과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와이프와 함께 직접 만든 것이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주인장의 야무진 손끝은 와인에도 묻어났다. 4가지 와인을 시음하는 내내, 일행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른 아침 시작된 시음에도 불구하고, 뱉어내지 않고 꿀꺽 꿀꺽 목으로 넘겼다. 지금도 상큼한 포도향 생각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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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독 지역의 가장 작은 아뺄라시옹 물리스의 '샤또 브라나스 그랑 뿌조'를 방문했을 땐 와이너리 소유주의 딸과 손녀가 반겼다. 2002년 시작한 양조장 리노베이션은 2004년에 끝났다. 설비에 많은 투자를 해 오크통을 전면 교체했다고 했다. 소유주의 딸은 자신의 와인을 '작은 보석'에 비유했다. 과장하거나 특별하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며 2005년산 와인을 추천했다. 특히 그해는 날씨가 좋고 포도 재배가 정석으로 이뤄져 올딩도 가능한 와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인지 와인의 풍미는 깔끔하고 간결했다.
▲전통의 양조 기술과 현대식 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해 운영하고 있는 '샤또 씨싹'.
오메독 AOC의 '샤또 씨싹(Chateau Cissac)'은 비아라르 가문이 5대째 이어어고 있는 오래된 와이너리. 작고 오래된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샤또 시싹은 전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새로운 양조기술을 받아들이는 운영철학으로 와이너리 만의 '고유성'을 지켜가고 있었다. 이들의 신념은 와인에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2008년 밀레짐(빈티지)을 시음했는데, 입안 전체를 메우는 강한 구조감과 섬세한 탄닌에서 메독 와인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장인의 손길을 닮은 와인
메독 와인에서 독특한 것이 '크뤼 아르띠장(장인)'이다. 와인 소유주가 포도 경작부터 발효, 숙성, 병입, 판매까지 와인 생산의 전 과정을 도맡아 한다. 주로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볼 수 있는데, 생떼스테프 AOC에 있는 크리 아르띠장 와이너리인 '샤또 라 뻬르(Chateau La Peyre)'에 방문했다.
양조장에 들어서자 발효 중인 와인의 풋풋한 향이 먼저 반겼다. 그동안 들른 숙성고는 춥고 서늘했는데, 이곳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와인 메이커는 2012년 산 햇와인을 담은 오크통에 귀를 대보라고 했다. '보글보글' '톡톡'. 기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와인이 익어가는 소리예요. 살아 있다는 증거죠."
▲메독 AOC '샤또 뚜르 까스띠용'.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맞춰보라며 다양한 음식을 내왔다.
이번 일정의 마지막 날, 메독 AOC의 '샤또 뚜르 까스띠용(Chateau Tour Castillon)'에 들렀다. 소담한 마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와이너리 소유주의 인심은 더욱 정겨웠다. 와인을 시음하려고 식탁에 둘러앉자, 와인은 어떤 음식과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며 한 상 가득히 음식을 내왔다. 그들은 와인투어에도 관심이 많았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게 산책·콘서트·바이크 등을 접목한 여러가지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었다. '아, 이런 시골에서…. 대단한 열정이다.' 이같은 와인 메이커들의 노력이 작은 메독 지방의 와인을 세계적인 와인으로 이끌었으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