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어디를 가도 서울의 남산처럼 도시 중앙에 산을 두고 있는 수도는 극히 드물다. 애초 남쪽 경계였던 것이 도시 확장과 함께 한가운데 위치하고 만 것인데, 인간의 손도 그만큼 더 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남산의 스토리들'은 생각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든지 산책이나 조깅을 하기에 맞춤한 순환로가 있다든지, 요즘의 남산은 그저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사실 남산은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참혹했던 인권유린의 현장 가운데 한 곳이다. 지난 1995년까지만 해도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고기 육'자를 써서 '육국'으로까지 불린 안기부, 즉 국가안전기획부가 있던 곳이 바로 남산이다.
지난 2006년 문을 연 서울유스호스텔을 비롯해 '문학의 집 서울', TBS 교통방송, 서울소방재난본부 등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뒤쪽에 위치한 건물 대부분은 안기부 사무동과 취조실, 안기부장 관사 등으로 쓰였다. 서울종합방재센터 재난종합상황실로 쓰이고 있는 지하 벙커에서는 모진 고문과 감금이 이뤄졌다. 안쪽에 자리 잡은 옛 서울시청 별관은 유독 악랄한 고문이 행해졌던 곳이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음습하고 공포스러운 취조실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꼭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만도 없다. 안기부 본관을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기 직전, 그 역사성을 고려해 인권기념관이나 민주화운동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제안이 잇따랐지만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두 가지 위대함, 즉 '산업화'와 '민주화' 가운데 산업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이나 역사 유산들은 여럿이지만, 오랜 군사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온 민주화운동 기념시설은 여전히 변변치 않은 실정이다.
서울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영욕이 점철된 이 땅의 현대사를 서울 한복판에서 증언해주고 있는 거대한 현장 박물관과도 같다. 그런 면에서 옛 안기부 본관을 인권기념관이나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제안들이 다시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과거 서슬퍼렇던 남산이 인권의 보루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그 여부는 곧 한국인들의 인권 감수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