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박찬욱 감독의 진짜 관심사는 대부분 '여자'였다.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이같은 성향이 무척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그가 창조해낸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선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유 의지를 실천하는 영화속 여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랬다.
28일 개봉될 박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 역시 여자, 구체적으론 소녀의 잔혹한 성장담을 그린다. 태평양 너머로 활동 무대를 옮겨서도 자신의 작가적 야심을 구현하고 인장을 남기는데 충실했다는 얘기다.
열 여덟 살 생일에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아빠(더모트 멀로니)를 사고로 잃은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찜찜하다. 남편의 죽음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찰리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의지하고, 인디아는 엄마의 이같은 변화를 기분 나쁘게 지켜볼 뿐이다. 찰리가 인디아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별다른 노출 장면 없이도 시종일관 팽팽한 성적 긴장감을 내뿜는다. 피아노를 함께 치며 기묘하게 교감하는 인디아와 찰리, 와인을 나눠마시면서 서로를 유혹하는 찰리와 이블린의 모습은 일종의 삼각 관계처럼 묘사된다. 또 모녀지간인 인디아와 이블린은 죽은 아빠일 수도 혹은 찰리일 수도 있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연적으로 그려진다.
원죄의 출발점과 파멸의 종착지로 가족을 다뤘던 '…금자씨'와 '올드보이' 그리고 '박쥐'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목이다.
성적 긴장감은 인디아의 변화를 거들고 증명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엄마와 찰리의 밀회 장면에 충격을 받은 인디아가 같은 학교 남학생을 유혹하고, 굽 없는 새들 슈즈에서 성숙한 여인을 상징하는 하이힐로 갈아신은 뒤 내재된 광기를 발산하는 모습은 극도로 위험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비교적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지만, 전작들마냥 일부 불친절한 구석이 있어 모든 장면을 꼼꼼히 따져보는 세심함이 요구된다. 행여라도 몇몇 장면을 허투루 넘겼다가는 마지막 한 조각이 없어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경험할 수도 있겠다.
박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연착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근래 들어 비영어권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거둔 성과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청소년 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