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은 1952년 2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아버지 박정희 대령과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육영수 사이에서 2녀 1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박 당선인이 장충초등학교 2학년이던 61년 당시 소장이던 부친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으며 2년 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당선인은 성심중학교에 입학하던 64년부터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성심여고 졸업 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한다. 원래 역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우리나라 전자사업의 대부인 김완희 박사가 부친에게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조언이 계기였다.
서강대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 당선인은 교수의 꿈을 안고 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으로 6개월만에 귀국했다. 자서전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고 밝힐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슬픔도 잠시 박 당선인은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 아버지의 서거…18년의 칩거
박 당선인은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의 서거로 또 한 번의 비극을 맞는다.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관저로 올라와 박 당선인을 급히 깨운 뒤 유고 소식을 전했다. 박 당선인의 첫 마디는 "지금 전방은 괜찮습니까"였다.
박 당선인은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며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박 당선인은 9일장을 마치고 청와대 생활 15년만에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1997년 정계 입문 전까지 박 당선인의 긴 칩거생활이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 속에서 잘나가던 인사들은 박 당선인에게 대부분 등을 돌렸다. 박 당선인이 자서전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향후 정치 행보에서 '변절자'를 단호하게 대한 것도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해석이 많다.
이 기간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학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 선친의 역사적 정당성을 외롭게 주장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러난 87년에야 부친 서거 6년만에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 34년만에 대통령으로 청와대 입성
박 당선인은 97년 11월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5선 국회의원' 박 당선인의 본격적인 정치적 행보가 시작됐다. 2000년에는 당 총재 경선에 출마해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미래연합'을 창당했고 2002년 5월에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며 '남북 철도연결'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닥치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선거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으며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만들어내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5차례의 국회의원 재ㆍ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40대 0의 완승을 거뒀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유세에서 괴한에 목숨을 잃을 뻔한 테러를 입으면서도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을 챙긴 일화는 유명하다.
높은 지지율 속에서도 박 당선인의 2007년 첫 대권 도전은 이명박 후보에게 밀려 석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내내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대세론'을 형성했다.
2010년 정국을 달궜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이 대통령과 달리 박 당선인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박 당선인은 '판정승'을 거뒀고 이후 다시 당을 장악했다.
이명박 정권심판론의 구도 속에서 지난해 4·11 총선의 패색이 짙었지만 박 당선인은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해 152석을 얻으며 당내 가장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지난 12·19 대선에서 박 당선인은 헌정 사상 최초의 과반수 득표율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 첫 여성 대통령이란 신기록을 쓰며 승리를 거뒀다.
25일 취임식을 갖는 박 당선인은 1979년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만에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자격으로 다시 청와대에 들어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