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승부사'로 통하는 강우석(53) 감독이 4년 가까이 시달리던 지독한 편두통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다음달 11일 열 아홉 번째 연출작 '전설의 주먹'을 선보이는 강 감독은 "전작 '이끼' '글러브'와 달리, '전설의…'는 초심으로 돌아가 정말 즐겁게 찍었다"며 특유의 자신감을 드러냈다.
▶ 제목 끌리고 간결한 줄거리 푹 빠져
백전노장 베테랑이지만 앞서 '이끼'와 '글러브'를 연출할 때는 중압감에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글러브'는 처음 도전한 스포츠 영화인데다 청각 장애인의 내밀한 감정 표현을 다뤄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고, '이끼'는 원작 웹툰의 심오한 주제를 훼손할까봐 두통약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고교 시절 한 주먹 하던 중년 사내들이 TV 격투기 리얼리티 쇼에서 맞붙는다는 내용의 웹툰을 옮긴 '전설의…'는 그러나 기획 단계부터 거침이 없었다. 제목부터 우선 마음에 들었고,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줄거리가 강 감독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건 내 영화다' 싶어 바로 덤벼들었죠.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의 홀가분한 느낌은 참 오랜만입니다.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아주 쉬울 영화이므로 '이끼' 때 잠시 저를 좋아했던 (웃음) 평단은 다시 욕할 지도 모르겠어요. 지나친 자신감이라고요? 에이, 익숙했던 예전으로 돌아간데 대한 편안함으로 해석해 주세요."
▶ "난 정말 남자배우 복 많은 감독"
강 감독은 남자배우 복 많기로 유명하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랬다.
복싱 챔피언을 꿈꿨지만 지금은 딸과 단 둘이 사는 국숫집 사장 노덕규 역의 황정민, 카리스마로 일대를 평정했으나 고교 동창인 사장 밑에서 자존심을 굽히고 사는 대기업 부장 이상훈 역의 유준상, 40대로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삼류 건달인 신재석 역의 윤제문 등 출연진 모두가 페르소나였던 설경구·정재영처럼 하나같이 톱스타 특유의 가식과는 거리가 먼 '순둥이'인 덕분에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진 호흡과는 별개로 크나 큰 위기도 경험했다. 유준상이 클라이맥스의 대규모 액션 장면 촬영에서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을 때였다.진통제를 맞고 촬영을 강행했지만 결국 혼절한 유준상은 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고,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 이 모습을 지켜보던 중 '이러다 아까운 배우 한 명 잡겠다' 싶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강 감독은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는 유준상이 빠지면 제작비 4억원이 날아갈 상황이었다"며 "수술을 끝내자마자 촬영장으로 돌아온 유준상이 오히려 '미안하다'며 500여명의 보조출연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숙연해졌다.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니 난 정말 복받은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 한국영화의 호황을 바라보는 시각과 과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치른 영화인답게, 절정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요즘 한국영화에 대해선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쏟아냈다.
먼저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호황이 관객들의 호주머니에서 시작됐다며, 한국영화를 대하는 신뢰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으므로 지금의 흥행몰이는 꽤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주 5일제 수업 실시와 복합상영관의 보급도 중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반면 이럴 때일수록 영화인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영화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돈을 감당하지 못하고 흥청망청대며 질 낮은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하면 영리한 관객들은 대번에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제가 제작했던) '왕의 남자'의 성공 이후 제작사들이 외부 자본과 손잡고 너도나도 코스닥 상장을 시도하면서 충무로의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때였어요. 후배들에게 '우리 이러다 공멸한다'고 자주 경고했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자신감은 가지되 자만해선 안되는 시점입니다. 퀄리티 유지론 부족해요. 지금보다 더 끌어올려야겠죠. 저를 포함한 모든 한국 영화인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사진/이완기(라운드테이블)·디자인/양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