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의 소중한 제보로 행방이 묘연했던 문화재를 찾아내 화제다.
21일 서울시에 따르면 현재 문화재로 지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연복사탑중장비(演福寺塔重創碑)가 발견된 사연이 흥미롭다.
이 비석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재건된 목탑인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애를 태웠다.
최근까지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는 사실만 파악됐을 뿐 정확한 소재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 흩어진 우리 문화재의 원위치와 소재지를 찾는 데 심혈을 기울여온 이순우씨가 연복사탑중창비를 인터넷 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에 사진과 설명으로 게재했다.
지난해 2월 24일 카페회원 김석중씨가 '길을 가던 중 우연히 연복사탑중창비를 발견했다'는 글을 올렸다. 한 시민의 눈썰미가 제자리 잃은 문화재의 행방을 찾고 드디어 그 가치를 밝히게 된 것이다.
김씨는 용산 철도회관 앞 화단에 있던 비석을 보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는 생각에 자세히 들여다봤고, 카페에서 봤던 연복사탑중창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비석은 왜 용산으로 옮겨진걸까.
연복사는 경기도 개성 남산동 및 한천동에 있었으나 경의선 철로가 바로 옆을 스치고 있었고, 개성역과의 거리도 지척이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경의선 부설과 관련해 용산구 한강로 3가 65번지 일대에 있던 용산 철도구락부로 이전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철도구락부는 용산공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옛 철도병원(현재 중앙대 용산병원) 쪽에 걸쳐있었다.
해방 이후 1952년 그 자리에 항공대학이 들어섰다가 1961년 용산 한강로 40번지(옛 교통부 시설국 청사)고 이전됐는데, 이 과정에서 연복사탑중창비도 함께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산역 민자역사 신축공사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다시 세워졌던 개성의 연복사탑은 1563년(명종 18년)에 소실됐다. 이같은 사실은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치윤(1765~1814)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연복사탑의 중창내력을 담은 연복사탑중창비는 조선 후기까지도 원형대로 잘 남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연복사탑중창비의 존재가 다시 확인된 때는 1910년 9월의 일이다. 그 당시 일본 동경제대 건축과의 세키노 타다시(1867~1935) 교수 일행이 고적조사를 벌여 서울 용산으로 옮겨진 연복사탑중창비를 포착함으로써 그들의 조사목록에 이 비석의 존재가 처음 채록됐다.
학계에서는 연복사탑중창비에 대해 상당한 역사적 가치 있는 비석으로 우리 역사에서 중국식 석비 양식 수용과 조선시대 석비예술을 볼 수 있는 초기의 대표적 자료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시는 지난해 9월부터 코레일과 보존방안을 협의 중이며 시 문화재위원회 조사와 사전심의를 통해 문화재 지정가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한 달간 문화재 지정계획을 예고한다.
예고기간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다음달 중 유형문화재로 최종 고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