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여자 중에 황씨가 있었다.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복통을 앓았다. 의원이 여러 약을 처방했지만 차도가 없었는데 황씨가 김칫국물을 마시면 나을 것 같다며 호소했다. 이 말을 들은 중국 책임자 황엄이 "혹시 사람고기가 먹고 싶다면 내 다리를 베어서라도 바치겠는데 이런 황무지에서 어찌 김칫국물을 얻을 수 있겠냐"며 난감해 한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며칠이 지나도 복통이 가라앉지 않던 어느 날, 황씨가 측간에서 죽은 아이를 낳았다. 이웃집 관노와 통해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쉬쉬하며 북경에 도착해 황제와 동침을 했지만 다음날 아침 들통이 났다. 처녀가 아닌 것을 알고 진노한 황제를 달래느라 애 먹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한국인이 아플 때 약 대신 김칫국물을 마신 역사는 뿌리가 깊다. 수십 년 전만해도 시골에서 아이들이 배앓이를 하면 할머니가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떠주며 속을 달랬다. 연탄으로 난방을 했던 시절,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응급처방으로 김칫국물을 마시라며 장려했던 시절도 있었다.
김칫국물은 심지어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도 쓰였다. 조선 중종 때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나돌아 670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평양감사가 문책까지 당했는데 이후 전염병 치료에 동원된 약이 바로 나박김치와 그 국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십년 전, 사스라고 하는 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이 퍼졌을 때도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김칫국물이 예방약으로 유행한 적이 있으니 김치국물의 효능에 대한 신뢰가 뿌리 깊다. 중국서 AI(조류인플루엔자)가 퍼진다는 소식에 떠오른 이야기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