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전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사태에 귀도 눈도 정신 사나웠던 것이 이젠 어언 먼 날의 일 같다. 이제는 이름 석 자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사건이라는 것은 대개가 그런 식인가 보다. 그 일이 한창 화제일 무렵 내 귀에도 '개인적 증언'들이 속속 도착했다. 소싯적 인턴이거나 말단직원일 때 그런 일을 당했거나 당할 뻔한 적이 있었지만 잘잘못을 떠나 당시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 그에 대해 함구하며 씁쓸한 과거로 묻었다고 토로하는데 울컥했다. 윤창중 사태로 엄연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강화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한편 카카오톡으로 회사 여성직원에게 사적인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낸 행위가 성적 혐오감이나 굴욕감을 느끼게 했으므로 성희롱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최근 화제였다. 이제 성폭력의 범위는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넘어 결과적으로 상대 여자가 불쾌감을 느낀 것까지 책임을 지는 양상이다. 당사자인 여자분이 얼마나 시달렸을까 마음이 안 좋으면서도 동시에 이제 남자들은 보신을 위해 이것이 집적댐인지 자체검열을 하며 상대 여자의 똘레랑스 정도를 눈치껏 사전에 간파해야 하는 신공을 펼쳐야만 할 것 같다.
지난 번엔 한 다리 건너서 이런 사연을 들었다. 짝사랑하던 남학생과 드디어 같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술이 둘 다 취한 후 귀갓길에 그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기습키스를 했다고. 여학생은 그가 자기 마음을 받아줬다고 기뻐했지만 다음 날 남학생은 술김에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자백했고 이에 여학생은 자신이 추행당한 피해자라며 공적인 영역에 호소하려고 했다. 잠시 한숨. 덜 좋아하는 이가 권력자라면 역시 이것도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성립하는가?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권력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성폭력은 당연히 근절되어야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의 시시비비는 장차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법과 제도가 프라이버시의 어느 선까지 파고들며 부모 노릇을 할 것인가. 복잡한 사안을 자칫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글/임경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