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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권기봉의 도시산책] 서울 정동 경성방송국 첫 방송을 쏘다

▲ 첫방송국터



한국 방송은 지금으로부터 85년 전인 지난 1927년 초에 쏘아올려진 라디오 전파가 최초였다. 서울 정동 덕수초등학교 자리에서 개국한 경성방송국에 의해서였다. 미국에서 세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이 시작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경성방송국은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국영 방송에 가까웠다. 그런데 독특한 사실은 당시 라디오방송에서 조선말이 많이 쓰였다는 점이다. 1933년부터는 아예 별도의 조선어 채널을 만들기도 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당시 라디오라는 것은 청취자들의 문화와 교양 수준을 높이는 것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선동을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인이 많았기에 일제의 의도를 조선인들에게 선전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쉽에 알아들을 수 있는 조선말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어 채널을 만든 이유가 조선인들의 편의를 충족시켜주는 데 있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1939년 중일전쟁을 시작하고 41년에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방송을 본격적인 선전선동 매체로만 이용했다. 연예 오락 프로그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보도 프로그램만을 운영했다. 물론 그 보도라는 것은 일본군의 전투 실적을 부풀리거나 조선인의 참전을 부추기는 내용들이 태반이었다.

1935년 들어서는 경성방송국이라는 이름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꾼 뒤 10만 대의 라디오를 보급하는 운동과 동시에 방송을 전국으로 확대해 갔다. 이때 만들어진 지방방송국이 평양과 신의주, 부산, 대구, 광주 등에 20개에 가깝다. 결국 1929년 총 5200여 대에 불과했던 라디오는 해방 직전 30만 대 수준으로 60배 가까이 늘어났다. 일제의 의도가 각 가정 구석구석까지 직접 도달했다는 의미다.

물론 일제의 어용 방송은 1945년 8월 패전과 더불어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특성마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관청의 의미를 지닌 '국'자를 쓰는 '방송국'에서 자유로운 방송이 가능한 '방송사'로 명칭 자체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권력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해방 뒤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을 세운지 벌써 60여 년이 흘렀다. 과연 일제가 남기고 간 잔재로부터 한국의 방송사들은 얼마나 '해방'되었을까. 덕수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서있는 '첫 방송터' 기념탑은 아무런 말이 없다.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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