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민음사
남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이, 이 남자는 조용히 조끼 주머니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쓱쓱 스케치한다. 사라져가는 파리의 뒷골목 카페를 기록하는가 하면 공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며 간절한 마음을 상상한다. 지갑을 잃고 버스를 놓친 속상함도, 페루 트레킹에서 짐을 잔뜩 싣고 다녀 미안했던 당나귀는 하도 눈에 밟혀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을 그리면 여행이 어떻게 달라질까. 저자는 여행길의 새로운 도구로 그림을 제안한다. 재빨리 사진을 찍어 실시간으로 메신저와 페이스북, 블로그에 올리는 데 익숙한 이들에겐 느릿느릿하고 품을 파는 아날로그식 방법이지만 그림 여행을 권하는 저자의 확신은 강하다.
우선 언어에서 해방돼 보라는 것.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자동차가 기어변환을 하듯 그리는 동안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며 "평소와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여행지에서 만큼 그림 그리기에 좋은 시간도 없다"고 자신한다.
무언가를 그리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나하나 관심을 갖고 보게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림 여행의 매력이다. 빠르게 스쳐지나가지 않고 머물렀을 때, 그때서야 보이는 것들이 생기고 사진으로는 기록할 수 없는 '여행하는 나'를 남길 수 있게 된다.
이번 여름 휴가에 그림 여행을 체험해도 좋겠다. 앞서 저자는 이집트 여행을 떠나는 어머니에게 스케치북을 쥐어드렸고, 그림을 배운 적도 없던 어머니는 사소하면서도 새로운 발견들을 수수하지만 아름답게 그려 아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방법도 재미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에게 그려주고 실망하기'다. 저자는 페루 친구와 서로를 그려주었는데 '나는 제법 닮게 그렸다고 자부하는데 (상대는) 이럴수가!'라며 경악했지만, 페루 사람이 그린 한국 남자의 얼굴은 낯설어서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