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신화를 새로 쓰고 있다. 들개로 태어나 괴물로 길러진 북한 특수전사 원류환이 슈퍼집 바보 동구(김수현)로 위장해 간첩 공작을 벌이는 이 영화의 배경은 따뜻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달동네다.
동구가 쌀가마를 지고 오르던 가파른 언덕길, 납치된 꼬맹이를 찾기 위해 넘나들던 낮은 지붕과 옥상…. 동화처럼 아기자기한 풍경은 거대한 세트장이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봤다면 인천 부평구의 십정동의 '열우물마을'이 영화의 촬영지임을 알 수 있다.
십정(十井)동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열 개의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산동네인 열우물마을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철거민들이 모여들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됐다.
상정초등학교 맞은 편 상정문구·슈퍼 오른쪽으로 조그맣게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열우물마을이 시작된다. 조금 더 돌아 큰길을 이용해도 되지만 다닥다닥 붙어선 난쟁이 집들 사이로 그려진 벽화를 감상하기에는 골목이 조금 더 적합하다. 마을의 빛바랜 시멘트벽과 전봇대는 2002년 지역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인 '열우물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모두 도화지가 됐다. 낮고 넓은 돌층계는 칸칸이 음표로 칠해졌고 꼬마아이들이 낙서하는 모습, 활짝 핀 해바라기, 뜀박질하는 강아지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열우물마을의 아름다움은 벽화에만 있지 않다. 70~80년대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옛날식 양복점이나 허름한 슈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빨래, 길가에 놓인 화분이며 깨진 벽돌과 장독, 제멋대로 엉겨 자란 나무는 그 어떤 현대식 건물 장식보다 깊은 감성을 전달한다. 위로 죽 뻗은 길고 높은 경사와 계단을 오르다보면 숨이 아닌 마음이 벅차오른다.
마을길 중에서도 제법 넓은 축에 속하는 언덕은 영화 속에서 동구가 사는 석이슈퍼가 있던 곳이다. 촬영을 위해 세웠던 가건물은 크랭크업과 함께 철거됐지만, 계단벽에 그려진 초록색 트레이닝복의 소년이 동구 대신 언덕길을 지키고 서있다.
집배원 아저씨와 동구가 나눠 먹던 아이스크림을 한 개 물고 천천히 거리를 감상하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지금은 주거환경개선지구로 분류돼있지만, 언제 재개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한 장 남기는 것을 추천한다. 마을을 돌아보는 동안 주민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동암역 2번 출구에서 십정초등학교 방향으로 직진, 주민센터에서 우회전해 열우물 102번길로 진입. 블로그 등에서 마을 초입으로 소개되는 상정·문구 슈퍼에서 출발하려면 금호어울림 아파트 쪽으로 내려가 상정로에서 우회전한 뒤 200m 가량 직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