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밖은 서정적 안은 야만적
횃불 전투신 조명없이 찍었죠
할리우드 본격진출? 천만에!
봉준호(44) 감독이 8년전 홍대앞 만화방에서 처음 접했던 상상 속 이야기를 마침내 스크린에 펼쳐냈다. 다음달 1일 개봉될 '설국열차'다. 언론시사회 다음날인 23일 삼청동에서 만난 봉 감독은 "오랜 암덩이가 몸 속에서 빠져나간 느낌"이라며 지난 작업에 대한 고단함과 흥행에 대한 기대를 함께 드러냈다.
-어제(22일) 처음 영화가 공개됐다.
언론시사회 때는 못봤다. 기술 시사가 마지막이다. 며칠 뒤 일반 관객과 함께 볼 건데 그 때가 가장 짜릿하고 무섭다.
-김지운('라스트 스탠드')·박찬욱('스토커') 감독이 올해 초 할리우드 진출작을 선보였지만 흥행에 실패해 부담이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 영화에는 송강호 씨가 있으니 훨씬 낫지 않을까. 흥행은 정말 모르는 일이다.
-8년간 '설국열차'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유는.
마음에 품고 구상할 때 만큼 행복할 때가 없다. 그 해 여름 '괴물'을 촬영하면서 머리 한쪽 구석에는 '설국열차'가 있었다. 김혜자 선생님과 약속해 '마더'를 먼저 찍었지만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더' 크랭크업 날 ('설국열차'의)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이 "이제 기차에 올라타야지"라고 말하더라.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했고, 가시밭길이 시작됐다.
-어떤 부분에 가장 매료됐나.
달리는 기차 안의 생존자 모습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밖은 하얗고 서정적인데 속은 구질구질하고 야만적이다. 그 이미지를 배우와 필름으로 반드시 재현하고 싶었다. '마더'도 구상부터 개봉까지 5년이 걸렸다. 고속버스에서 춤추는 아줌마를 그려내겠다는 집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같은 집착이 해소될 때까지는 평정 상태가 될 수 없다.
-촬영하며 가장 쾌감을 느낀 장면은.
기차 안 횃불 전투를 찍을 때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흥분했다. 조명 대신 100% 횃불로만 촬영했다.
-세계적인 배우들을 비롯해 송강호의 역할 배분은 어떻게 했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명확한 중심 인물이고, 나머지 인물이 워낙 많아 적절히 균형있게 했다. 송강호 씨에게도 그런 맥락에서 역할이 주어졌다. 송강호 씨가 연기한 남궁민수는 차원이 다른 비전을 품고 있는 인물이므로 출연 분량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적 정서나 배경이 아닌 보편적 코드에 주제가 맞춰져 전작에 비해 재미가 덜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적인 괴이한 유머가 나오지 않는 건 사실이다. 예전에도 유머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랐을 뿐이다. 이번에도 원작과 시나리오에 따라 흘러갔고, 기본적으로 기차 안의 극단적인 감정을 더 강하게 표현했다.
-프리 프로덕션을 철저하게 했지만 촬영 중 시행착오는 없었나.
특별히 없었고, 2개월 4주, 72회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마더'가 90회였는데 말이다. 유일한 어려움은 아역배우를 콘트롤하는 것이었다.
-해외 시스템으로 첫 영화를 완성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박찬욱·김지운 감독도 경험했겠지만 영화의 기본 공정은 똑같은 것 같다. 일본에서 '도쿄'를 찍어봤고, '괴물' 때도 해외 스태프와 일해봐서 낯설지 않았다. 물론 이번엔 규모가 훨씬 컸지만 이전에 조금씩 적응해 왔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설국열차'를 계기로 오우삼 감독처럼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다음 작품도 한국어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2010년에 시놉시스를 써놓은 작품이 있다. 이 외에 미국 에이전시에서 제안한 SF 영화가 있고, 일본에서 제안한 만화 원작 영화가 있다. 저를 매혹시키고 제가 집착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어디서든 할 것이다..k·사진/박동희(라운드테이블)·디자인/김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