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CEO와칭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경제>경제일반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정겹다. 헌책이 쌓인 자리에서 흑백사진의 풍경이 떠오른다. 시간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던 존재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활판인쇄로 된 책은 글자 하나하나가 종이에 자신을 찍어 자취를 깊게 새긴다. 누렇게 색이 변한 종이를 펼치면 그동안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세월의 진액이 이름 모를 향기처럼 피어오른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점방(店房)들이 줄지어 있다. 부산 토박이 억양으로 발음하면, '점빵'이다. 물론 골목도 '꼴목'이 된다. 그제야 정말 제대로 올 곳에 온 느낌이 든다. 자갈치 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보수동은 헌책방 골목의 고향이다.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와 종로 피맛골도 모두 개발주의의 포크레인으로 찍혀 나가버렸으나 이곳은 다행히 아직 버티고 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여긴. '책의 피맛골'인 셈이다. 고관대작이 탄 말이 지나갈 때까지 땅에 엎드려 지내야 했던 서민들이 그런 굴욕을 피하기 위해 들어선 골목이 피맛골이다. 당연하게도 서민의 애환이 나누어지는, 이른바 '오프 브로드웨이'가 생겨난 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실험주의 예술정신은 오프에서 태어난다. 그걸 죽이는 순간, 브로드웨이의 생명력도 고갈된다. 그런데 이 나라는 아주 태연하게, 그런 역사와 문화 살해 정책을 밀어붙인다. '점빵'과 '꼴목'은 도시에서 지워지고, 대신 마트와 대로만 전시된다. 고관대작들이 피맛골까지 점령한 꼴이다.

헌책방은 가난한 시절의 산물만이 아니며, 새 책을 사지 못하는 이들의 고달픔을 삭혀주는 곳만이 아니다. 어떤 책이든 책은 당대의 목소리와 발언 그리고 흔적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 시대가 지나면 다시는 그런 책을 내거나 쓸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헌책은 단지 헌책이 아니라, 그 책을 낳은 시대의 소중한 자화상이다. 자기의 자화상을 잘 간직하고 읽어내지 못하는 공동체는 '지금과 내일'에 대한 깨우침이 초라해진다.

미국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 영국 런던의 체링크로스와 일본 동경의 진보초 헌책방 거리, 프랑스 파리 센 강 주변의 헌책노점상들. 모두 그 나라 문화의 자랑스러운 맥박이다. 우리와 너무도 비교된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살려내고 아끼는 일은 부산시민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건 이 나라 전체의 정신사적 책임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