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잦던 2주전쯤 일이다. TV를 틀면 홈쇼핑 방송에서 '이것'을 사란다. 아열대로 변하는 요즘 날씨에 아주 쓸모 있단다. 마트에 가니 3~4일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예약이 밀려 있었다.
기자도 이것, 즉 제습기를 사야하나 귀가 솔깃했다. 밤새 선풍기 바람에 말렸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건으로 어쩔 수없이 얼굴을 닦을 때, 제습기를 예찬하는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제습기만큼은 사고 싶지 않았다. 우선 놓아둘 데가 마땅치 않았다. 관리도 버거웠다. 집안엔 '제습기' 친구들이 이미 많았다. 살균제 파동이 나기 전까지 쓰던 가습기와 가습기를 대체하기 위해 구입한 에어워셔, 그리고 아이 때문에 산 공기청정기와 바이러스 잡는다는 항균 청정기 제품까지 먼지 쌓인 채 방치돼 있다.
세상은 넓고 살 것은 많아지고 있다. 주방과 다용도실은 터져나갈 듯하다. 요즘 주부들의 위시리스트에는 건강에 좋다는 에어프라이어와 원액기부터 소다수 제조기, 식품 건조기, 아이스크림 제조기, 캡슐커피 머신 등이 오른다. '강남 냉장고'라 불리는 한 이탈리아 브랜드 냉장고는 세컨드 냉장고로 유행이란다.
청소기만 해도 음식 부스러기를 바로 치워줄 무선 청소기와 맞벌이 주부에게 꼭 필요하다는 로봇청소기, 세균을 없애주는 스팀청소기에 진드기를 처리할 침구 청소기도 갖춰야 한다. 기존 세탁기 옆엔 아이 옷만 빨래하는 미니 세탁기까지 있어야한단다. 숨이 찬다.
우리가 사는 집 크기는 그대로이거나 쪼그라들고 있는데, 사야할 건 무섭게 불어났다. 가전업체들은 새로운 '틈새시장'이라며 세컨드 가전이나 대체 가전을 출시하고 알리는 데 주력한다. 소비자로서 충분히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제품들이지만 진짜 필요해 꾸준히 쓰는 건 몇 안 된다. 소비자란 똑부러지듯 보이지만 결코 지혜로운 집단은 아닌 듯하다.
요즘 3평에 불과한 '스몰 하우스'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늘고 있다. 이들은 필요한 것을 더하는 셈법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빼고 났더니 딱 3평 만한 공간만 필요했다고 말한다. 집에서 쓰는 생활용품도 100가지 정도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심플 라이프를 실천하는 그들이다. '무소유'를 강조한 법정 스님도 말했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것"이라고.
기자는 제습기를 사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만들어봤다. 기존 에어컨으로도 제습기능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몇 십 만원짜리 제습기를 사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라고. 그러나 결국 방마다 옮겨 다니며 습기를 없앨 수 있다는 이유로 제습기를 사고 말았다. 그리고 이젠 '내년까지 어디에 두나'하며 후회하고 있다. 또 얽혀버리고 만 불량 소비자다. /전효순 생활레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