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無所不爲)와 안하무인(眼下無人)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 오던 국내 대형 유통업계가 사정당국의 서슬 퍼런 칼날에 떨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1일 롯데백화점과 홈플러스, 롯데마트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입점업체나 납품업체에 비용을 전가하는 등 불공정 행위를 한 사실을 적발하고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62억500만원을 부과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매번 10억원 미만에 머물렀던 솜방망이가 갑자기 박달나무가 됐다. 이번에 과징금 폭탄을 피한 대형 백화점이나 유통업체들도 시기만 문제일 뿐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절대 갑(甲)'의 위치에 있는 유통업체가 납품업체를 이용해 경쟁사의 영업계획이나 영업비밀 이외에 불공정 행위, 찌라시 수준의 기업정보까지 취합해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힘없는 납품업체를 닥달해 세일기간 경품비 대납행위는 물론 자사나 그룹사의 행사에 협찬을 강요하거나 자사 PB상품을 강매하기도 했다. 명절 성수기에는 유통업체가 발행한 상품권을 구매토록 종용하는 등 수많은 불공정행위가 현존한다.
하지만 납품업체는 좋은 제품을 생산해도 판매경로(판로)가 없어질 경우 회사 자체의 존폐로 이어지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유통업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항들은 이미 여론을 통해 수없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국정감사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정부 기관은 당시에만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며 유통업체에 내성만 키웠다. 이로인해 대형 업체들은 쏱아지는 소나기만 피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렇게 '안하무인'격이던 유통업체들이 21일 공정위 발표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공정위가 유통업체에 부과한 과징금이 10억원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롯데쇼핑이 지난 2005년 5월 부당 지원행위로 받은 과징금이 9억4800만원, 롯데홈쇼핑이 거래상 지위남용으로 2008년 12월 받은 과징금 7억2800만원 등이 고작이다. 그러던 공정위가 롯데백화점에 45억7300만원, 홈플러스 13억200만원, 롯데마트 3억3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과징금을 각각 부과한 것이다. 물론 이 과징금은 재심의나 법원 판결 등으로 조정될 수 있다.
이번 조치는 공식적으로 유통업계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지난해 초부터 시행에 들어간 '대규모유통업법'에 따른 첫 제재 사례다. 단순한 첫 사례라고 하기에는 과징금의 규모가 심상치 않다.
대규모유통업법과 관련 시행령, 고시는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과징금 상한을 납품대금 또는 연간임대료의 60%로까지 두고 있다.
통상 공정거래법상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과징금 상한이 관련 매출액의 2%인 것과 비교하면 '과징금 폭탄'이 사실상 처음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당초 관련 업계에서는 이번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액이 수백억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공정위 사무처는 지난 20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롯데쇼핑, 신세계백화점, 현대백화점(한무쇼핑 포함), 이마트 등 '유통업계 빅4'를 대상으로 세일기간 중 납품업체에 과도한 비용을 물렸다는 이유로 총 21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무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증거와 법리가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21일 발표에 이름을 올린 롯데백호점, 롯데맡, 홈플러스 등 3개 업체의 ▲입점업체에 경쟁 백화점의 매출자료를 요구 및 활용 ▲자사 골프대회 협찬금 제공 ▲자사 직영 판촉사원의 인건비를 전가 등의 사항만이 위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규모유통업법에 따른 세일기간 중 판촉비 과다지원 심사가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향후 조사 결과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해당 업체들은 과징금 액수가 지나치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롯데백화점 측은 "과징금 금액이 너무 과도하다"며 "경쟁업체의 매출이나 시장잠유율 파악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에 이 같은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토로했다.
홈플러스는 "파견 직원의 처우개선을 위해 실시한 조치가 불공정거래 행위로 제재를 받았다"면서 "또 공정위가 인건비를 전가했다는 혐의로 제재 조치를 했는데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소명을 했는데도 13억원의 과징금을 받았다"고 당혹감을 나타냈다고 한 언론이 전하기도 했다.
롯데백화점은 내부 법률자문을 거쳐 행정소송을 검토 중이다. 홈플러스도 회사 내부적으로 이번 결정을 검토한 뒤 대응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사정의 칼을 꺼내든 공정위가 얼마나 제 역할을 다하고 칼을 집어 넣을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비자 단체의 한 관계자는 "이번 공정위의 조치에 대해 환영한다"면서도 "유통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행위가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겠지만 업계 나름의 자정과 선순환적인 유통 구조향상에 이바지하려는 움직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