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진앙지인 동남아시아에서의 K-팝 열기는 올 상반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식어갔다. 국내 방송사와 검증되지 않은 현지 공연 기획사들이 기획한 종합선물세트식 공연이 경쟁적으로 열렸고 일방적으로 일정이 취소되는 사례까지 이어지며 K-팝에 대한 현지 팬들의 신뢰마저 무너졌다. 공급조절의 실패는 물론 아이돌 댄스그룹으로 획일화된 콘텐츠도 문제로 지적받았다. 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K-팝 쇼케이스 '바간자 온 노벰버'는 이 같은 위기를 돌파하고 3세대 한류를 확장시켜나갈 대안을 제시했다.
◆ 대형 클럽 온 듯한 공연장
올해 힙합의 대중화를 전면에서 이끈 힙합 듀오 긱스와 하이브리드 힙합 그룹 팬텀이 한국 아티스트를 대표해 '바간자 온 노벰버' 무대에 올랐다. '바간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젊은 뮤지션 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류의 지속적 해외 진출을 위해 기획됐다.
자카르타 시내의 대형 쇼핑몰인 간다리아 시티몰에는 1000여 명의 팬들이 몰려 3시간 내내 폭발적인 함성과 열기를 뿜어냈다. 마치 대형 클럽을 연상시키듯 관객들은 일제히 힙합 리듬에 몸을 맡기며 춤을 췄고 팬텀의 '버닝' '뉴 이어라' '팬텀 시티', 긱스의 '오피셜리 미싱 유' 등을 한국어로 합창했다.
현지 공연 기획사인 BIG엔터테인먼트 아디 이르완 대표는 "이번 쇼케이스는 K-팝에 대한 현지 팬들의 최근 관심을 가장 잘 보여준 무대였다"며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던 팬들의 상당수가 다양한 장르의 한국 대중음악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 특히 힙합과 발라드는 다시 한류 열기를 끌어올릴 대안임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 블루오션 인도네시아 시장 개척 의미
K-팝의 다변화와 함께 블루오션인 인도네시아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한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의 의미가 크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인 2억50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G20에 속한 숨은 경제 강국이라는 점에서 여느 지역보다 탄탄한 한류 수요층을 보유하고 있다. 또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는 곳으로 K-팝이 아랍권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들의 문화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인도네시아판 '슈퍼스타K'인 '갤럭시 슈퍼스타'를 후원했고, 기대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얻어 최근 시즌 2까지 제작됐다. 올해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40주년을 기점으로 정부차원의 다양한 문화 교류도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을 주최한 레인보우브릿지 김진우 대표는 "인도네시아는 인접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까지 4억 인구를 포괄할 수 있는 큰 시장이다. 한국 아티스트의 현지 진출은 물론 한국 제작 시스템 수출과 현지 인재 발굴 등 다양한 한류의 모델이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고 내다봤다.
◆ 체계적 시스템 구축 필요한 시점
국내 연예기획사들은 일본·중국과 달리 동남아 시장에서 일회성 이벤트 위주의 진출에 머물러 왔다. 현지 시장의 잠재력에 눈을 돌려 보다 체계적인 한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레인보우브릿지다. 국내 음악 관련 업체 중 최초로 베트남과 태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인도네시아 법인 설립도 눈앞에 두고 있다. 3개 국을 중심으로 인접 국가까지 아우르며 정상급 아이돌 그룹들을 성공적으로 진출시켰고 긱스와 팬텀은 물론 최근 백지영과도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톱 여가수와의 계약도 앞두고 있다.
그동안 현지인을 발굴해 한국의 인큐베이팅 시스템으로 육성해 현지에 데뷔시키는 3세대 한류를 개척해온 강점을 앞세워 공연은 물론 현지 방송과 문화 시장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최대 오디션 프로그램인 '갤럭시 슈퍼스타'를 진행해 남성그룹 S4와 여성그룹 SOS 등을 현지 톱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시킨 바 있는 레인보우브릿지는 내년 3월 베트남의 공영방송 VTV에서 '롯데 VK-팝 페스티벌'을 개최해 K-팝과 현지 문화의 융합 작업을 계속해 간다.
김 대표는 "장르 다변화와 제작시스템 수출은 글로벌 K-팝이 나아갈 새 활로"라며 "대형 기획사가 갖추지 못한 현지화에 최적화된 지속 가능한 수익구조를 개척한 에이전시가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디자인/박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