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랜맨'를 보고 있으면 정재영(44)은 천상 연기자다 싶다. 극중 1분1초까지 계획하는 일명 '플랜남'으로 분해 마치 주인공이 진짜 자신인 것 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원맨쇼를 펼쳤지만, 실은 새해 계획조차 세우지 않는 '무계획남'이다. 그는 "게을러서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 5년 만에 코믹물 출연
약 한달 전 개봉한 '열한시'에서 연기한 시간이동 프로젝트 연구원 우석을 비롯해 '내가 살인범이다' '글러브' 등 최근 몇 년간 보여준 진지하고 무게 있는 모습과 다르다. 극중 웃기려고 하지는 않지만 무계획적인 삶을 맞닥뜨리며 어쩔 줄 모르는 어수룩한 모습이 오히려 웃음을 '빵빵' 터뜨린다.
2009년 개봉작 '김씨 표류기' 이후 5년 만에 코믹물로 돌아온 정재영은 "오랜 만에 웃을 수 있는 작품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계속 진지한 것만 하면 재미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장된 캐릭터라 오히려 과장하지 않으려고 한 게 통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재영 덕분에 현장은 늘 쾌활하고 화기애애했다. 이번에 한지민과 자연스러운 호흡을 보여준 그는 "지민이가 정말 착하고 스태프에게 친절하다. 그런데 내게 절대 '오빠'라고 부르지 않더라. 별로 나이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선배라고만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 이렇게 바쁜 건 10년 만에 처음
정재영이 연기하는 한정석은 신호동 건너는 시간, 편의점 건너가는 시간 등 하루 일과를 오로지 알람에만 의지한 채 사는 인물이다. 그러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후배 유소정(한지민)의 도움으로 점점 정상적인 삶을 찾는다.
"실은 저와 닮은 점이 전혀 없어요. 전 상당히 무계획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거든요.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 언젠가부터 그냥 나대로 살기로 했죠. 하루살이처럼 하루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좋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하루에 충실한 삶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삶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요즘엔 그 어느 때보다 계획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9일 개봉한 '플랜맨' 개봉을 시작으로 올해 '역린'과 '방황하는 칼날'까지 선보일 예정이라 일정이 홍보와 촬영 스케줄로 꽉 차 있기 때문이란다.
"지난해 두 작품을 촬영했는데 많이 논 듯한 느낌이에요. 보통 배우가 한 작품을 촬영하는데 2~3개월이 걸리니 6개월을 집에 있었거든요. 너무 논다고 집에서 구박 엄청 받았죠. 하하하. 지금처럼 바쁜 건 지난 10년을 통틀어 처음인 것 같아요."
# 실제 성격은 게으른 편
계획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때도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신기전'을 고되게 촬영하면서 두 번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려 한달 넘게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후에는 봉사도 하고 담배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나약해 쉽게 변하지 않더란다.
자신의 성격에는 배우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게으른 성격이라 회사를 다녔으면 아마 열두 번은 더 때려 쳤거나 백수가 됐거나 아니면 장사를 했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 뒤 "연기를 운명처럼 만났고,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녀에 대해서도 계획에 따라 강요하지 않는 편이다. "아이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않아요. 우린 집에서 텔레비전 채널권을 가지고 다투는 정도죠. 아이들도 나처럼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정재영에게도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제 삶에 영향을 준 영화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한번 작품으로는 힘들겠지만 계속 하다 보면 조금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박동희(라운드테이블)·디자인/박은지